애그플레이션과 식량안보
GSnJ 연구위원 양승룡(고려대 교수)
메릴 린치(Merrill Lynch)가 만들고 국내 모 유명 방송인이 에그플레이션(eggflation)으로 혼동해 더욱 유명해진 신조어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 전 세계 식량상황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농산물가격의 상승에 기인한 인플레이션이라는 뜻의 애그플레이션은 대부분 국가의 물가지수에서 차지하는 농산물가격의 낮은 비중을 고려할 때 농산물가격이 얼마나 폭등해야 발생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2007년 봄부터 시작한 국제 농산물가격의 폭등세는 지난 한달 새 100%나 상승했고 지난 25일에는 단 하루 동안 밀 선물가격이 20%나 상승해 부셸 당 23달러를 훌쩍 넘기면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주요 농산물 수출국인 카자흐스탄의 수출세 부과로 촉발된 투기적 수요는 당분간 지속돼 적어도 앞으로 1~2년은 국제 곡물가격이 예전 수준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상당히 낮다. 이런 국제 곡물가격 급등은 비단 밀 가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옥수수와 대두, 쌀 등 곡물과 곡물을 이용해 생산하는 소고기, 달걀, 우유 등 축산물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금의 애그플레이션은 2년 연속 발생한 주요 수출국들의 흉작이 기폭제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요인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요인들이 시장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국제 곡물시장을 압박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바이오에너지 정책을 들 수 있다.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주요 선진국들과 중국, 인도, 브라질 등 고도 경제성장국들이 옥수수나 대두 등을 주원료로 하는 바이오에너지 사용을 확대시키면서 식량용 곡물의 수급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여기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에 따른 식량소비의 절대적 증가와 사료를 이용하는 축산물 소비의 증가가 세계 식량수급에 구조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1950년대 녹색혁명 이후 농산물 가격은 하향 추세선을 중심으로 주기적으로 순환하면서 변동해왔다. 이상기후로 인한 일시적인 수급불균형은 생산 조정을 통해 2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의 애그플레이션은 구조적인 문제로 상당 기간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100달러를 넘나드는 고유가시대에 수소연료 등 보다 저렴한 대체에너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바이오에너지가 유일한 대안이 될 것이다.
연 10%가 넘는 중국의 경제성장과 조만간 중국을 능가할 인구대국이 될 인도의 인구증가세도 국제 곡물시장에 구조적 수급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다. 공급 측면에서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패턴으로 고착화될 경우 국제 식량상황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으로 우려된다.
애그플레이션은 선진국에 비해 엥겔지수가 높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개발도상국에 보다 심각한 문제가 될 전망이다. 아직 소득의 20%를 식품소비에 사용하고 식량자급률이 27%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경우도 애그플레이션은 사회적 안정을 해치고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복병이 될 소지가 많다. 현재 진행 중인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과 미국과 유럽,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은 국내 식량생산기반을 더욱 취약하게 할 것이다.
전 세계 농업에 더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온 애그플레이션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수출국의 식량무기화는 안정적인 식량자급률과 국내 농업기반이 국가안보와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전제가 됨을 시사한다. 외국의 값싼 농산물에 의존하는 식량 수급정책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만성적으로 높은 농산물가격은 높은 원유 및 원자재 가격과 함께 우리 경제를 장기적인 침체의 늪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기름과 원자재가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 적어도 식량문제에서만은 식량무기화의 조짐을 보이는 수출국들과 저소득층의 생존을 위협하는 국제 투기세력으로부터 식량안보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해외식량개발과 선물시장을 이용한 안정적 조달능력의 제고가 중요한 과제이다. 또한 일본과 같이 식량자급률을 법제화해 농업기반을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국민을 안심시키고 지속적 경제성장의 초석을 다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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