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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농사꾼의 색깔있는 행복이야기 [민승규]

곳간지기1 2010. 10. 11. 08:46

 

농촌진흥청 민승규 청장은 농업에 꿈을 불어넣는 스타강사다. 민간연구소인 삼성경제연구소에 있으면서 농촌현장 봉사활동으로 '농업인 컴퓨터 강좌'를 개설해 좋은 반응을 보이자, 금산에다 '한국벤처농업대학'을 설립해 경영마인드를 갖춘 스타농업인을 육성하는 일에 혼신의 열정을 바쳤다.

 

현정부에서 청와대 농수산정책비서관으로 발탁되었고, 농림수산식품부 차관으로 갔다 다시 이번에 농촌진흥청장으로 부임하였다. 청장으로 부임해서도 '사이버농업인 전진대회(문경)'와 농촌진흥청 직원을 대상으로 꿈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번에 한국사회 자원봉사운동 활성화를 위한 세종로포럼 특강자료가 녹취되었기에 소개한다. 

   

<특강자료> "멋쟁이 농사꾼의 색깔있는 행복이야기"

 

 ■ 자 : 2010년 9월 16일(목)

     ■ 소 : 서울프레스센터 매화실

 

 ■ 연사 : 민승규 농촌진흥청장

 ■ 주관 : 한국시민자원봉사회

 

 

  

◈ 들어가는 말

 

안녕하세요? 방금 소개 받은 녹색우체부 민승규입니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제 밤늦도록 며칠 동안 국회 예결위 일정이 계속되어, 강의 자료에 다소 소홀한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강의요청을 받았을 때는 농업정책에 대한 소개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여기가 자원봉사조직이라 눈높이를 맞추어 사례 중심으로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사실 저도 개인적으로 15년 전부터 농촌 자원봉사를 계속 해왔습니다. 96년 즈음에 경기도 화성에서 처음으로 농민들 대상으로 컴퓨터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PC를 교체할 때, 연구소장님께 '저에게 헌 PC를 주시면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씀드려 PC 15대를 기증 받았습니다. 몇 년을 써서 새까맣게 변한 것을 깨끗하게 닦아서 새 것처럼 만들었죠. 그런 다음 화성군 농협에 부탁해서 김치공장 창고를 하나 빌려서 PC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게 마우스이고, 이게 모니터입니다”부터 시작해서, 워드․엑셀 프로그램까지 함께 했습니다.

 

세 달 쯤 지나니까 한 농민이 자꾸 손을 들어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선생님, 왜 컴퓨터 안 파세요?' 이러시더라구요. 제가 그 당시 삼성경제연구소에 있었는데, 경제연구소는 잘 모르시고 삼성만 아시는 탓에, ‘컴퓨터 팔러 온 직원인데 세 달이 지나도록 왜 사라고 안 할까?’ 했던 거죠. 나중에 사정을 아시고 나서, 제가 컴퓨터 팔러 온 것이 아니라 컴퓨터교육을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교육이 기수로 5기를 했는데 소문이 좋게 났습니다.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그래서 화성에서는 제가 지금 가도 유명인사입니다.

 

 

컴퓨터 교육을 하면서 느꼈던 점이 참 많았습니다. 몇몇 농민은 하나를 알려드리면 열을 깨우치시는 겁니다. 한 분은 가만히 보니까 장남이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공부를 못하신 겁니다. 만약에 그 분이 정말 공부를 하셨다면 여기에 계신 선생님들 이상으로 훌륭한 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 농민은 50이 넘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굉장히 성공한 농업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다이아몬드가될 수 있는 농민들이 전국에 얼마나 많을까?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으로능력 발휘를 못하는 농민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5기까지 프로그램을 끝낸 후, 이런 훌륭한 농업인을 더 찾고 싶은 마음에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제 연구실에 큰 지도를 사다 붙여 놓고, 160개 시군을 훑고 다녔습니다. 농민들을 모셔 놓고 교육을 하고, 농가에서 같이 잠을 자면서 밤샘토론을 하고, 또 다음날에는 직접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한 10년 걸리더라고요. 이 과정에서 ‘아, 결국 사람이 희망이구나'라는 알맹이를 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업이 어렵다고 하는데, 어렵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뭔가 새로운 희망을 갖고 있는 분들이 분명 계십니다. 정말 사람이 희망이고, 이들이 멋진 꿈을 갖는 것이 우리 농업의 새로운 에너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일본에서 어느 기자가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기업 경영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인터뷰한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당신은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그 분 하시는 말씀이'자기는 지금까지 많은 고난과 역경을 잘 견뎌 냈는데 딱 보니까 세 가지 역경을 잘 견뎌내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라고 말하더군요.

 

 

바로 역경 지수였습니다. AQ라고 하는데 성공한 분들은 많은 고난과 역경을 잘 견뎌내서 역경지수가 높은 분들이더라고요. 그분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세 가지 역경을 잘 극복했다고 합니다. 첫째가 '가난의 역경'이었답니다. 너무 가난해서 그 가난을 극복하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가 '건강의 역경'이었답니다. 어렸을 때부터 늘 몸이 허약해서 몸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건강의 역경을 잘 견뎌낸 것이지요. 세 번째가 뭡니까? 했더니 '배움의 역경'이었답니다. 배운 게 없어서 남한테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역경, 가난의 역경, 건강의 역경, 배움의 역경을 잘 견뎌내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더라도 성공하신 분들을 보면 머리(IQ)만 좋아서가 아니라는 걸 느낍니다. 역경 지수가 높은 분들은 절대 남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 때문에 안 돼.'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절대 남의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역경 지수가 높은 분들은 자기를 비하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해도 안 되는 놈이야. 나는 하는 것마다 실패야'라고 자기를 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제일 중요한 특징이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더라는 겁니다.

 

제가 오늘 소개하는 “멋쟁이 농사꾼”도 똑같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멋진 농부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다 아시겠지만 이 사진은 1950년대 우리나라 농촌 사진입니다. 그 당시 '보릿고개‘가 있었지요. 요즘 세대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건식량인데 그게 해결되지 않은 힘든 시대였지요. 당연히 60년대 대한민국 농업정책의 가장 큰 화두는 식량자급이었습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식량증산이 가장 절실한 과제였고, 그때 지금 제가 몸담고 있는 농촌진흥청이 발족이 되었습니다.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육종학의 발전과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한 농업과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개발, 보급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가 쌀 자급을 하게 되었지요.

 

80년대에 들어서는 시설농업기술이 개발․보급되었습니다. 비닐하우스 농법으로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필요한 채소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명 ‘백색혁명’이라고 한답니다. 이때 처음으로 우리 농업을 어렵게 만드는 수입개방 문제가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90년대 들어와서는 국내외에서 안전한 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친환경 농업이 부각되고, 농업의 다원적 가치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농업에 BT, IT 기술이 접목되고, 안전한 친환경 농산물이 우리농업의 하나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농업은 더 발전해서 도시에서도 식량공급이 가능한 '빌딩형 식물공장'으로 새롭게 진화할 거라고 봅니다. 사진만 보면 대한민국 농업도 나름대로 많이 발전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50년대와 비교해 보면 우리 농업은 분명히 발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산업으로서 농업은 여전히 어렵다고 하고 있고, 다른 산업과 비교할 때 발전의 체감 속도가 더딘 것은 사실입니다.

 

농촌의 현실을 딱딱한 자료로 말씀드리는 것 대신에 농촌 어린이가 쓴 시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이 시는 김용택 시인이 쓴 산문집에 나오는 초등학교 5학년 박초이 학생이 쓴 시입니다. 제목이 '촌아 울지마'입니다. 다섯 줄 밖에 안 되는데 바로 농촌의 현 주소를 너무도 생생히 표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다들/

도시로 이사를 가니까/

촌은 쓸쓸하다/

그러면 촌은 운다/

'촌아 울지마'/

 

초등학교 5학년 학생 눈에 비친 우리 농촌의 현 주소입니다. 과거에 비해 농업기술은 발전하고 농촌도 좋아졌지만 아이의 눈에 여전히 농촌은 쓸쓸하고 울 것 같은 겁니다.

여기 오신 분들께 “농업이, 농촌이 소중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다들 농업이 소중하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농촌에 계신 분들 뿐 아니라 도시에 계신 많은 분들도 농업은 소하고 농업과 농촌은 유지되고 발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거꾸로 물어봅니다. “그렇게 소중한 농촌에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딸이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도시에 있는 내 아들이, 내 딸이, 내 사위가 농사 짓겠다고 농촌에 내려간다고 하면 선뜻 찬성하고 응원해주기 어려우실 겁니다. 농업의 어려운 현실 때문이겠지요. 정말로 농업과 농촌이 소중하다면 우리 자식들이 가업으로 물려받아도 좋을 만큼, 젊은이들이 취업하고 싶은 직업군에 농업이 들 수 있도록 현재의 문제를 바로 보고 해결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째로 농촌이 더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여러분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아시나요? 건물 주변에 유리창이 깨져 있고 치우지 않으면 그 다음날 그 곳을 중심으로 쓰레기가 모입니다. 그런데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은 사람들은 더 가꾸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농촌의 자연경관은 큰 자원이자 농촌의 소득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농촌의 아름다운 경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둘째, 농촌에 살고 있는 농민들의 삶이 좀 더 질적으로 높아져야 합니다. 삶의 질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특히 경제적 소득이 높아져야 합니다. 만약에 농가소득이 연간 1억 이상의 고소득을 낸다면 누구라도 농촌에 오고 싶어질 것입니다. 농업을 하시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면, 세계 식량안보를 위해서 농사짓는다는 분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가족들을 책임지고 살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농사짓는 겁니다. 그러려면 가족들을 책임질 만큼 어느 정도의 소득이 보장되어야겠지요.

 

셋째로, 평범하게 도시에서 월급을 받아가며 사는 사람들은 정년이 점점 빨라지있습니다. 대부분이 50대 중반이면 달리 진로를 모색해야 합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평균수명 100세를 바라보고 살게 되었습니다. 노후를 보내야 하는 시간이 30~40년으로, 경제활동기간에 비하여 긴 노후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우스개로 쓰는 말이 ‘현대인의 인생은 이모작 인생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모작 인생에서 농촌은 굉장히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노후에 대다수 도시민들이 정말 살고 싶은 곳이 농촌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농촌 그 자체가 도시민들이 노후를 보내게 될 귀한 자원인 셈입니다.

 

살고 싶은 농촌, 젊은이들이 업으로 삼고 싶은 농업이 되려면 지금의 대한민국 농업․농촌은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부터 농업․농촌의 어려운 여건과 문제를 정부의 지원과 보조로 버티어 왔습니다. 하지만 지원과 보조에 의존하다 보니 정작 농업과 농촌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농업이 동굴 속에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식량문제가 화두였던 과거에는 식량증산이 사활이 걸린 문제였지만, 지금은 농업인들의 소득을 많이 올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게임의 법칙이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시장개방이라는 흐름 속에 농업도 변화된 게임의 법칙에 적응을 해야 되는거죠. 우리 농업은 아쉽게도 아직은 약자의 입장입니다. 미국 농업, 유럽 농업이 대한민국 농업보다 강자인데 약자인 대한민국 농업이 강자를 이기려고 했을 때 그냥 어영부영해서는 못 이깁니다. 처절하게 노력을 해야 하는데, 진짜 중요한 것은 신념과 전략뿐만 아니라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앞차를 추월하고 싶을 때 무조건 빨리 달린다고 앞차를 추월할 수 없듯이, 약자가 강자를 이기려면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을 바꿔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앞차를 추월하기 전에 반드시 차선을 갈아타야 되는 것처럼, 약자인 대한민국 농업이 강자를 이기려 할 때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약자이고 골리앗은 강자인데, 약자인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죠. 이 그림은 IMF 때 재미교포 한 분이 보내준 그림입니다. 개구리가 새한테 먹혔어요. 정말 죽게 생겼죠. 그런데 먹힌 개구리가 새의 목을 비트는 거예요. 그래서 Never ever give up!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약자인 한국농업이 강자인 미국농업과 유럽농업을 이긴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보지도 않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한국농촌도 일반기업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농업 쪽에서도 ‘창조적 플레이어’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농업하시는 분들이 기업하시는 분 이상으로 뛰어난 “창조적 플레이어”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이든 경쟁자든 고객이든 간에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창조적 농업인들이많이 나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꿈이 있어야 창조적 플레이어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꿈이라는 한 글자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요. 꿈이 있으면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농업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널리 알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대한민국의 농업이 매력적인 산업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농업으로 성공하신 분들이 역할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 농업·농촌을 살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이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꿈 이야기를 좀 해드릴 텐데요. 영상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동영상 시청)

 

2007년도에 아주 엉뚱한 것을 전시해 봤습니다. 인사동에 ‘가나 화랑’이라고 있습니다. 미술품 전시를 많이 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농민들의 꿈을 전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당시 농업정책 보고서를 쓰면서 농민들의 희망과 꿈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농민들을 찾아가서 '당신의 꿈이 뭡니까?' 물어봤더니 꿈들이 너무 예쁜 겁니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농민들의 꿈을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를 해보자것이지요. 예술가를 모셔서 농민의 꿈을 이야기 했어요. 농민들의 꿈 이야기를 예술가의 손을 빌어 작품으로 표현을 한 겁니다. 그 때 전시회의 제목이 ‘미술관에서 보는 꿈의 대화’였습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이때 참여한 농민들의 사진들입니다. '멋쟁이 농사꾼의 색깔 있는 행복이야기' 강의 제목이죠. 농민들 인터뷰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그 때 전남 광양에서 매실농장을 경영하는 농업인 홍쌍리 여사님한테 물어봤어요. '홍여사님 당신은 꿈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섬진강 매화 밭에 핀 꽃은 내 딸이고 열매는 내 아들이다' 그런데 꿈이 뭐냐고 다시 물어 보니까, 이 3,000개 옹기 속에서 매실들이 장아찌․간장․술이 되는데 당신 나이가 여든이 되어도 아흔이 되어도 내가 만든 농산품이 작품으로 인정받는 멋진 농사꾼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겁니다. '내가 여든이 되고 아흔이 되어도 내가 만든 농산물이 작품으로 인정받는 멋쟁이 농사꾼이 되는 것이 내 꿈이다'. 이 꿈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다음 소개할 분은 경남 사천에서 녹차밭을 경영하는 이창효 농업인이십니다. 이 분에게도 꿈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녹차는 중국, 일본에도 있는데, 그것을 뛰어넘는 명품녹차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 분은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주변 농가들을 함께 묶어서 꿈을 키워나가고 계십니다. 조만간 명품 녹차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경기도 화성에서 배 농장을 경영하시는 이윤현 농업인입니다.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서 3대째 농사짓다가화성으로 이사 왔는데 배의 명인입니다. '창고가 비어도 자식만은 굶기지 않고 땔감이 떨어져도 자식만은 찬데 재우지 않는 것이 부모 마음인데 저에게는 배가 자식입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분은 과수원에서 음악회를 여는 분입니다. 농장 배꽃이 필 때마다 클래식 음악하시는 분을 불러서 음악회를 엽니다. 수확할 때도 음악회를 엽니다. 배 농사만 열심히 짓는 분인 줄 알았는데 특허가 열 몇 개가 있더라고요. '꿈이 뭡니까?' 했더니, 배를 이용해서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스타벅스처럼 세계 어디 가서라도 자기 제품을 파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을 특허 냈냐고 하니까 배깍두기(맛이 기가 막힙니다)와 배조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배를 말려서 과자를 만들었는데, 제품이름이 '건배'입니다. 말린 배라는 뜻이지요.

 

 

저는 전국에 제자들이 천여 명 있습니다. 그 중 기억에 많이 남는 제자가 바로 이 부부입니다. 완도에 가시면 이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식당이 있는데, 그 이름이 '구절초 시인과 전복 신랑'니다.

 

사실 제가 작은 농민대학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벤처농업대학(정식대학은 아닙니다)이라는 곳이지요. 그런데 부인이 벤처농업대학 관련 기사를 보고 찾아와 학생으로 인연을 맺었지요. 부인이 졸업을 하면서 그 당시 농림부장관상을 받았습니다. 글을 너무 잘 쓰시기에, 제가 '구절초 시인'이라고 이름을 짓고 명함도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걸 보더니 후배로 입학을 했습니다. 나중에 남편은 최우수학생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인은 구절초, 남편 분은 전복을 키우면서 식당을 하는데 이분들의 꿈이 이렇습니다. 한눈에 바다가 들어오는 구절초 꽃동산에 모여서 세상에 시름 다 잊고 ‘아, 이런 별천지도 있구나’ 하면서 감탄하는 사람들 앞에서 음식 팔면서 조용히 사는 것이 이 부부의 꿈이라고 합니다.

 

 

이 분은 전북 진안으로 귀농하여 버섯 농사를 하고 있는 30대 농부입니다. 군대 제대 할 때 우연히 '6시 내 고향'을 보고 귀농을 결심한 분이지요. 그런데 원래 직업이 컴퓨터 하는 친구였습니다. 젊은 친구인데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젊은 친구답게 컴퓨터를 워낙 잘 하니까 버섯 키우는 이야기를 담은 UCC 100개를 만드는 것이 꿈이랍니다. 그래서 자기 고객들에게 나눠주고 싶답니다. 이것은 이 젊은이가 만든 첫 번째 UCC입니다. 버섯을 연간 10억 씩 파는데, 그냥 버섯을 파는 것이 아니라 UCC를 통해 자신의 꿈과 철학을 함께 팝니다. 소비자들에게 큰 신뢰를 주지요.

 

(동영상 시청)

 

이 분은 양평에서 ‘가을향기’라는 작은 농장을 경영하셨는데, 이 분의 꿈이 고등학교 때 농부였답니다. 고3때 장래희망란에 '부'라고 적었답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 했었나봐요. 선생님이 불러서 호되게 야단을 쳤다는 겁니다. 본인은 정말 꿈이 농부라서 농부라고 썼는데 담임선생님이 불러서 혼을 냈다는 겁니다. 결국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자기 꿈이 뚜껑 없는 지프차를 타고 초원을 달리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귀농해서 성공을 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대신 부인이 꿈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가지려 애쓰되 자식들 굶기지 않을 만큼이면 족하고 편케 살고자 하되 농땡이 부리지 않겠다'는 꿈이지요. 100년 된장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기 항아리를 보면 제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위에 '닥터 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10년 된 된장입니다. 그 된장을 100년 된 된장으로 만들어서 후대에 명품으로 만들어 주고 싶답니다.

 

이분들은 기업하시는 분들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계시는 겁니다. 정말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10년 전부터, 농업이 정말 소중하고 중요하다면 농업으로 성공하신 분들이 나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연예인과 운동선수만 스타가 있고, 농민들은 왜 스타가 되면 안 되느냐’라는 겁니다. 성공하신 분들이 나와 역할모델이 되면, 나도 한번 농업해서 성공해 볼까라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농민들과 함께 컴퓨터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는 농민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다이아몬드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거죠. 이런 농민들을 모아서 '농업도 벤처다'라는 생각으로 도전하기 위해 벤처농업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농업을 단순한 식량생산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농업이 1차 산업인데 거기에 다른 분야 2차건 3차건 0.5차만 더해 보면, 1차 산업은 1.5차가 되고 2차 산업인 가공업은 2.5차가 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융합․복합시켜 0.5차를 더하면 우리 농업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업에 0.5차 더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2000년도에 전국 각지에서 농업으로 성공할만한 농민 87명을 뽑았습니다. 10년 동안 보아왔던 분들을 뽑아서 그해 가을에 IT 벤처하시분들과 함께 ‘농업과 벤처의 만남’을 주선해 보았습니다. 대덕밸리를 견학한 농민들은 당장 그날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경영과 마케팅에 대한 조언을 요구하였습니다. 생산만 열심히 하던 농민들이 경영과 마케팅에 대한 필요성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2001년 한국벤처농업대학이 출범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1,000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습니다.

 

한국벤처농업대학의 “벤처정신”은 정부에게 1원도 지원받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자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벤처농업대학이 출범한지 3년 정도 지나자 농림부 장관께서 후원을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도 정부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후원금을 거절하였습니다. 유명한 일화가 되었지요.

 

벤처농업대학은 농업으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메일과 명함, 최근에는 블로그가 없으면 입학할 수 없습니다. 경쟁률이 높아서 200명 정원인데 600명 이상이 응모를 합니다. 서류심사로 1차로 거르고 2차는 면접시험을 보는데 면접을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봅니다. 벤처농업대학은 네 개 과로 운영되는데 정식 대학은 아닙니다. 농민학교로서 한 달에 한 번씩 수업하는 학교입니다.(매월 3번째 토요일 15:00부터 새벽 1시까지, 일요일은 9:00부터 12:00까지. 1년 과정) 수업 출석률은 95%에 이르지요. 한국벤처농업대학이 자리 잡은 충남 금산이 전국에서 가운데인데 강원도, 전라도, 경기도는 물론 제주도에서도 오시는데 대단히 열정적입니다.

 

천 명이 넘는 졸업생들이 나왔지만 정말 성공한 농민들, 홍쌍리 여사 같은 그런 분들을 천 명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광양의 홍쌍리 여사 말씀이 참 재미있습니다. 처음 1기 때 오셨는데 마을 농장에 오신 분들이 3만 명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백만 명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지요. 처음에는 황당해 하셨죠. 하지만 7년 만에 전화를 하셨습니다.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 농장에 백만 명 왔다갔다'고. 그런데 '그 분들 돈을 얼마나 쓰고 가셨습니까?' 했더니 '21억 정도 쓰고 갔다'고 합니다. 제가 또 말씀드렸습니다. '한 사람이 만원 쓰고 가게 만듭시다.' 그러면 백억이 되는 거거든요. 지금 하고 있어요. 새로운 꿈을 드린 거죠. 스타 농민들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것이지요.

 

벤처농업대학이 알려지면서 일본에도 벤처농업연구회를 만들어져서 한국으로 매년 50명이 견학하러 옵니다. 일본에서 일본 농민들과 함께 심포지엄도 했습니다. 제가 일본에 가면 함께 간 농민들을 호텔이 아닌 민박에서 재웁니다. 처음엔 안가겠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하룻밤 자고 나면 다음날 아침에는 서로 껴안고 말도 안 통하는데 형님 아우가 되는 겁니다.

 

또, 벤처농업대학은 모 유통기업과 MOU를 맺어서 “1촌 1명품”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기업이 1촌마다 하나의 명품이 나올 수 있도록 벤처농업인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홈쇼핑에서 물건을 팔아주는데 수수료 없이 팔아줘요. 3억 이상 팔리면 그때 졸업입니다.

 

강사 분들도 훌륭한 분들이 많이 옵니다. 수업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5기 때의 사진인데 밤 12시 반에 찍은 겁니다. 지금 10기인데 사람들이 많이 늘었죠. 이것도 새벽에 찍은 사진입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그리고 매 수업 때마다 농민들과 런칭쇼를 준비합니다. 농민들은 농산물을 갖고 와서 스토리를 얘기합니다. 처음에는 내 농산물은 물 좋고 공기 좋고 인심 좋고 이 얘기밖에 못하는데, 농촌의 맑은 공기, 깨끗한 물, 하늘의 별 이런 모든 자원에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면 새로운 가치로 연결됩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면 고구마 있죠? 옛날에는 밤고구마인데 요즘에는 호박고구마가 인기가 있습니다. 이걸 물고구마라고 하면 안 됩니다. '노릇노릇 촉촉한 속살에 한 입 베어 물면 단물이 가득합니다'라고 했더니 이게 팔리더라고요. 그 고구마가 해남 산인데 맛있는 세 가지 비결을 강조했지요. 첫째, 황토에서 재배가 됩니다. 둘째, 남쪽이니까 풍부한 일조량이 있습니다. 셋째, 바닷가니까 부드러운 해풍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비자들은 특히 부드러운 해풍에 마음이 끌린 모양입니다. 해풍에 짠 맛이 간이 된다고 생각하나 봐요.

 

다음은 토론인데요. ‘우리 농장 망하는 길’에 대해 토론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 농장을 확실하게 망하게 하는지 토론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역발상이 가능해집니다. 아, 이러니까 망하는구나. 그 망하는 요인들을 내가 버려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런데 토론 중에 제일 많이 거론되는 실패요인은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정부한테 의존하니까 망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벤처농업대학은 숙소가 없어서 찜질방에 가서 잡니다. 보통 수업이 새벽 1시가 넘어서 끝납니다. 새벽에 찜질방으로 가려면 20분을 가야해요. 수년 전의 일입니다만, 새벽 1시가 넘어서 차량 100여대가 이동 하니까 지역경찰이 출동을 한 적도 있습니다. 놀란 주민이 신고를 한 거죠. 하지만 사정을 알게 된 경찰서장이 감동해서 그 다음 기수로 입학을 했어요.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것이 사업계획서 발표에요. 벤처농업대학은 입학보다 졸업이 더 어려워요. 60-70% 밖에 졸업을 못 합니다. 졸업하려면 각자 농장의 사업계획서를 발표하고 통과되어야 졸업합니다. 제일 오래 다닌 사람은 4년 동안 다녔습니다. 사업계획서를 발표하는 건 다들 어려워하십니다. 마지막에 강평도 하죠.

 

여기에 오신 분들도 자원봉사를 하시면서 많이 느끼셨을 겁니다. 교육은 그냥 교육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훌륭한 강사가 와서 교육하면 그때는 감동합니다. 그런데 일주일 지나고 한 달 지나면 강사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몸에 체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교육내용을 몸에 체화시킬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련한 방안이 매번 농민들이 농산물을 가져와 전시를 하게 했습니다. 특이한 건 저희는 강사료가 없습니다.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강사님들도 강사료가 없어요. 대신 농민들이 직접 가져온 농산물을 나누어 드립니다. 일종의 마케팅 활동이지요. 강사분들도 좋아하세요.

 

그리고 벤처농업대학은 비록 정식대학은 아니지만 체육대회도 하고 매년 인사동의 화랑을 빌려서 농업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전시를 합니다. 농산물을 예술작가들이 표현합니다. 이 전시를 한 번 하면 브랜드 가치가 확 올라갑니다. 또 전시 이름도 농산물 홍보전이 아니라 제목이 '인사동 블루스'입니다. 유명 놀이공원을 빌려서 음악회도 농민들이 직접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객들에게 자신을 알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2005년도에는 일본에까지 소문이 나서 일본 NHK에서 연락이 왔어요. 농민들 스스로 개최한 전시회에 매력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NHK홀에서 전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요. 전시는 성공적이었고, NHK를 통해 1시간 동안 보도가 되었습니다. 여기 보이는 사진이 그 때 전시했던 작품인데, 대장금에 나온 주인공을 쌀알 하나하나를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인기가 최고였죠. 이것은 계란 판인데요. 색깔을 입힌 거예요.

 

매년 심포지엄을 하는데 끝나기 30분 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다른 심포지엄에서는 보통은 이 때쯤이면 사람들이 많이 가고 없습니다. 그런데 끝나기 30분 전에도 자리가 없습니다. 결국 열정이고 정보의 가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전시도 심포지엄도 정부한테 의존하지 않고 농민들 스스로 비용을 댄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 매년 12월에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패션쇼를 합니다. 농민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로 패션쇼를 합니다. 무 하시는 분들, 고추 하시는 분들, 계란껍질로 옷 해 입은 분들. 패션쇼를 하고 나면 창피한 마음, 부끄러움이 모두 없어진답니다. 농민들이 워킹을 하고 나면 자신감이 생기는 거죠. 패션쇼에 나왔던 농민들입니다. 3개월 전부터 패션쇼를 준비하며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내 농산물 가지고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창조력이 생기는 겁니다. 농민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갑니다.

 

1년 과정인데 1년 한번은 21시간 철야로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오후 3시에 시작해서 그 다음날 12시까지 진행하지요.워크숍이 끝나면, 많은 분들이 자기는 밤새워 놀아본 적은 있어도 밤새워 공부한 적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웁니다. ‘한 숨도 안자고 공부를 했구나’라며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하여 눈물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농민들은 매번 수업 때마다 선서를 합니다. 우리도 한번 존경받는 농업회사의 사장이 되어보자 선서를 하며 각오를 다지는 것이지요. 제가 21시간 철야 수업한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동영상 시청)

 

이 음악도 농민들이 만들었고, 노래도 학생 중에 젊은 친구 4명이 부른 거지요. 2005년도에 한미 FTA가 타결되고 나서 수업 하다가 제가 그랬어요. '한미 FTA, 우리 더 뭔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했더니 '박사님 수업 철야로 해보죠.' 해서 하게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21시간을 철야수업 하는 것은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철야수업을 하고 났더니 농민들한테 남모를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제가 끝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연초에 당시 장관님께서 책을 한권 읽어보라며 주셨습니다. 300여 년 동안 명문가문으로 이어진 아일랜드 오닐 가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스페인에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이 먹고 살 것이 없게 되자, 왕이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옥토를 찾아보라 했는데 그 옥토가 아일랜드였던 것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로 아일랜드를 차지하려고 싸움을 한 겁니다. 왕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아일랜드에 손을 먼저 대는 아들이 그 땅을 차지하라는 시합을 제안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시합을 하는데 오닐보다 경쟁자가 더 잘 달리는 거예요. 아일랜드가 저 앞에 있는데 경쟁자가 먼저 강에 뛰어 들어간 겁니다. 이런 상황이면 아마 100명 중에 99명은 포기했을 겁니다. 그 때 오닐은 말에서 내려서 칼을 뽑아 자기 손목을 잘랐습니다. 경쟁자가 도착하기 전에 피 흘리는 손을 던집니다. 게임의 룰이 아일랜드 땅에 손이 먼저 닿는 사람이었거든요.

 

이 책을 읽고 저는 한국농업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 세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살아남는 자만이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농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농업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말로만 되뇌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경쟁력은 변화에서 비롯합니다. 현재 우리 농업의 키워드는 변화와 경쟁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둘째는 손목을 자른 것을 보면서 우리가 큰 것을 차지하려고 하면 작은 것은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셋째, 그 손을 자를 수 있다는 역발상이죠. 그야말로 창조적 역발상이지요. 이런 각오로 농업을 임한다고 하면 ‘한국농업!’ 분명히 희망이 있다는 것을 끝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공 : 사단법인 한국디지털영상속기협회(안문학, 02-876-0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