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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사람 우장춘 박사

곳간지기1 2010. 9. 15. 09:33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를 우리나라보다 일본인들이 추앙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잊을 수 없는 사람들" 특집 1번으로 우장춘 박사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부친의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농업연구자로서 조국을 위해 묵묵히 기여한 인물이다.

최근 농촌진흥청은 농업분야 세계적 과학자를 육성하는 '우장춘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구한말 격동기 세계적 육종가로 우뚝 섰던 우장춘 박사를 기리며 읽어보시기 바란다.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 뒷산 여기산에 있는 우장춘박사 묘소

 

"잊을 수 없는 사람 : 우장춘 박사" 

 

1) 우장춘 박사 : "한국농업의 위인, 부친은 역적"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지화 한 한일합방(1910년)으로부터 올해로 100년이 된다. 그 동안 한일양국의 역사인식 차이에 주목이 집중되어 왔었으나, 한국에서는 최근 식민통치 시대의 한국인과 일본인의 교류 실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작업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에서 역적 취급을 받아온 부친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동경에서 태어났지만 戰後 한국에서 “농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한명의 농업과학자의 이름이 다시 클로즈업되고 있다. 격동의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과거 100년을 되돌아본다.

 

우장춘. 아버지는 19세기말 이씨 조선의 왕비 “민비” 암살에 관여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조선왕조의 전직 군인이었다. 한일합방으로 이어지게 되는 부친의 사건 영향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서 공부를 한뒤 농상무성(농림성 전신)에 들어가 육종학의 세계적인 권위가 된 인물이다.

 

일본 패전 후인 1950년 3월. 건국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부름을 받아 “조국”의 농업진흥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한국정부는 금년 “우장춘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인 사업을 시작한다(농촌진흥청). 다섯 개의 연구테마를 모집하는 농업분야에서 세계에 통용하는 과학자를 육성하는 것이다.

 

정부에 의한 기념관 정비계획도 진행되고 있다. 일련의 프로젝트는 식민시대의 인적교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움직임을 강화하는 것이 될 것 같다. 우장춘의 부친인 우범선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1859년 10월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이익확대를 노리던 러시아와 세력타툼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때. 친러파의 민비가 왕궁 내에서 암살된다. 우범선은 다른 친일파 군인들과 함께 사건에 관여하였다. 사건은 주한공사 미우라가 계획하였다고 하여, 미우라를 포함한 56명이 일본에서 기소되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이 면책, 무죄가 되었다. 그후 일본은 한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식민지화의 움직임을 강화해간다. 사건후 우범선은 일당들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다.

 

2차대전 이전에 출판된 “東亞先覺志士記傳” 등에 의하면 우범선은 동경 혼고우에서 지내고 있던 시절, 근처의 귀족집에서 일하고 있던 사카이 나카와 결혼하여 1898년에 동경 아카사카에서 장남인 우장춘이 태어났다. 일가는 그후 히로시마로 이사하였으나, 우범선은 1903년 11월 “민비 복수”를 위한 2명의 조선인에게 습격을 받아 4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국가 역적으로 취급받아온 “우범선”과 위인이 된 “우장춘”.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다. 우장춘의 연구흐름을 추적하고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연구자인 윤무경(52세) 씨는 “학생시절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충격적인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마이니치신문 2010. 2. 12일자)

 

 

 

2) 죄를 씻기 위한 사명감

 

2009년 8월 10일, 한국 부산에서 있었던 “우장춘 박사 서거 50주년기념 심포지엄”은 전문적인 내용이었지만, 일반시민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는 우장춘이 아직도 한국인의 기억에 남아있다는 증거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우장춘은 한국어를 할지 몰랐으나 농업진흥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조국의 부름에 응해 1950년 일본에 처자를 남겨두고 한국으로 건너갔다.

 

부산의 연구소에 도착한 우장춘은 젊은 부하들과 함께 합숙과 같은 연구생활을 보낸다. 이러한 가운데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부친과 일본에 대한 생각을 살짝 드러낸 적이 있다. “피로 피를 씻어 내는 역사, 나는 평화로운 일에 종사하게 되어서 좋다”. 밤에 자택에서 우장춘 박사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전직 부하였던 현영주(82세) 씨는 우장춘 박사가 진심을 이야기 하였던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복수로 인하여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람,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로 생각하였다“고 현영주 씨는 말한다. ”靑島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라고 안타까운 표정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농림성 시절이었던 1937년, 1936년에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우장춘 박사를 中國 靑島의 시험장장으로 승진시키려 했던 이야기가 있었으나, “중국인은 자존심이 세고, 조선인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해서 임명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우장춘은 18년간 근무했던 농림성을 그만두었다.

 

홍영표(80세) 씨는 우장춘 박사에게 원고정리를 부탁받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보았던 것은 원고 사이에 끼워져 있던 민비암살에 관한 한국 신문기사를 오려 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역시 생각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전직 부하들은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 온 이유를 마음껏 연구하고 싶다“라고 하는 과학자의 마음과 ”부친 행동에 대한 사죄“의 마음이 복합된 결과로 해석한다.

 

작가 쓰노다씨는 우장춘 박사를 그린 “우리 조국”에서 부친의 조국에 대한 우장춘 박사의 불굴의 사명감“을 그리고 있다. 한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히로시마현에서 부친의 묘를 참배한 우장춘은 모교에서 강연을 했다. 그 때 모습을 전하는 기사가 현립 고교의 창립 100주년 기념지에 실려 있다. “독립은 하였지만 한국과 일본은 반드시 제휴해야만 한다는 부친에게서 얻은 신념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신념은 “성(誠)으로 일생을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이니치신문 2010. 2. 13) 

 

 

3) 흙에 살고, 뿌리를 내리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8월 10일 서울의 병원에서 61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 직전 대한민국 건국 2번째로 문화훈장을 병상에서 수여받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감사하다. 조국은 나를 인정해 주었다”. 한국어도 모르는데 한국에 와서 9년. 드디어 안주할 땅을 찾은 심정이었던 것인가?

 

우장춘은 일본에 있었던 때에 유채의 품종개량으로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고, 육종학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다. 한편 한국은 일본의 패전으로 독립을 하였으나, 국내에 채소류의 우량종자 생산기술이 없어서 귀중한 외화를 사용하여 일본에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김치에 사용하는 배추와 무 종자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때 일본에서의 업적을 알고 있는 관계자간에 우장춘 박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지식인에 의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생기고, 한국정부도 찬성을 하였다. 1948년 우장춘 박사가 후에 초대소장을 지낸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부산에 설립되었다. 1949년에 근무한 현영주(82) 씨는 당시 우범선의 아들이라고 하는 출신을 문제시 하는 의견도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어려운 농업환경 때문에 별개 문제였다. 한국으로 가기를 결단한 위대한 학자를 맞이하는 것은 보다 중요하였다“라고 당시의 사정을 이야기 한다.

 

1950년 3월 8일, 우장춘 박사를 태운 배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10일후 시민환영대회. 한복으로 차려입은 우장춘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축전소개에 이어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지금까지 모친의 국가를 위해 일본인에 뒤지지 않도록 일을 해 왔다. 여생은 부친의 국가를 위해 일하여 조국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 취임한 우장춘은 종자만들기와 후진양성에 노력하여 5년뒤에 종자의 자급 자족 체제를 거의 구축하였다. 우장춘이 한국에서 “김치의 은인”, “농업의 아버지”로 추모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품종개량된 종자가 일본으로 수출될 정도가 되었다.

 

한국 농업과학의 거점, 농촌진흥청(경기도 수원시)의 여기산에 잠들어 있는 우장춘 박사. 시인 이은상의 묘비문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되어 싹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의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개 하리라”

(마이니치신문 2010. 2. 14.)

 

 

  

4) 농가에게 배우고, 기록을 남기다

 

1939년 10월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제6회 일본유전학회. 농림성의 우장춘 박사와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서선지장(지금의 황해도 사리원)의 다카하시 노보루 지역시험장장이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친교가 두터웠던 것으로 보여지는 2명의 사이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 昇) 박사는 1918년 동경제대 농과대학을 졸업, 다음해 6월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경기도 수원시)으로 부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에 산미증산계획에 착수한다. 이것은 농업진흥과 쌀 소동을 불러온 일본내의 식량사정을 개선할 목적이었다.

 

조선반도에서 이루어져 왔던 벼 직파재배를 금지하고, 일본과 같이 못줄을 사용는 이앙재배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또한 관개시설 정비, 신품종 도입도 적극적으로 이행하여 증수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총독부 소속이면도 다카하시 박사는 독자의 견해를 갖게 된다. “전반적인 농업경영의 방법에 문제는 없는가? 농장에서 정밀한 시험을 하는 것보다 실태조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리하여 다카하시 박사는 1930년대 중반부터 종전까지 약 10년간 조선반도를 다니면서 사진과 함께 방대한 기록을 남긴다. 변색한 원고용지에는 농민의 이야기와 농구 등의 스케치가 가득 그려져 있다. “겸허하게 조선의 농가로부터 배운다”라는 생각을 실천한 원고는 약 1만3천장에 이른다. 생각이 떠 오른 것은 어려운 풍토에 적합한 우수한 농법의 존재이다. 조선농법이 뒤쳐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6년 다카하시 박사의 장남 다카하시 고시로(83세, 후쿠오카현) 씨는 부친이 근무하고 있었던 권업모범장을 뿌리로 하고 있는 수원의 농촌진흥청에 자료를 기증하여 번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전남대학교 구자옥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조사로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가치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읽어야할 자료이며, 기록된 재배법 등도 검증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연간 10만명이 방문하는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관에는 다카하시 박사의 사진이 다수 전시되고 있다.

 

종전 후에도 약 9개월간 한국인을 지도했던 다카하시 박사. 제언을 정리한 “금후 조선농법에 대하여”에서는 우수한 종자를 자급할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다카하시 박사는 후쿠오카현으로 이사한 후 2개월 후인 1946년 7월, 55세로 급사한다.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서 종자자급에 착수하기 시작한 것은 그후 4년후이다. “두명은 서로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우장춘 박사의 한국행을 알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라고 다카하시 박사의 아들 고시로 씨는 말한다.

(마이니치신문 2010. 2. 16.)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관 2층 농업역사관에 있는 1930년대 우리농촌 모습

  

 

5) 농촌의료에 충실히 매진

 

1918년에 동경대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다음해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에 부임한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 그후 농업의 실태를 파악하려고 다카하시 박사가 돌아다녔던 식민통치하의 조선반도의 한편에서는 일본인 소유 대규모 농장이 경영되었다. 한국 전북 군산시를 중심으로 조선반도 최대라고 일컬어지는 규모(3,000ha)를 자랑하는 “구마모토 농장”도 이러한 일본인 소유의 하나였다.

 

지난달 한국 농촌의료의 기초를 구축한 이영춘 박사(1903~1980)가 과거 살았던 군산시의 ‘이영춘 자택’이라고 불리는 옛집에서 1935년부터 10년간의 예산, 결산서류 등 구마모토 농장에 관한 신자료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서류 속에 들어 있던 일본인 경영자 구마모토 리헤이씨(熊本 利平, 1880~1968)가 전후 농장 진료소 의사였던 이영춘 박사에게 일본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구마모토씨는 나가사키현에서 태어나 20대 전반인 1903년에 조선반도에 건너와 농장지배인 등을 거쳐 농장경영자가 되었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이 구마모토씨는 전후, 일본에서 보내온 편지에서 “이 늙은이도 금년 84세, 요즈음 눈물도 많아져, 편지를 쓰면 옛일이 생각이 나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라고 이박사에게 깊은 정을 감추지 않고 토로하였다.

 

이 박사와 구마모토씨의 만남은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조수였던 이 박사는 농장의 진료소 의사를 찾고 있었던 구마모토씨를 고교시절 은사로부터 소개받았다. 당시 조선반도의 농촌 진료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의사가 없기 때문에 수의사의 진료를 받아야만 하였던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참상을 알고 있던 이 박사는 구마모토씨의 초청을 받아들인다. 이 박사는 그후 한국 농촌의료의 발전에 힘을 쏟아, 드디어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릴 만큼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일본인 소유의 대농장은 식민수탈의 전형이다. 이러한 농장에서 살았던 두사람간에 왜 전후까지 지속적으로 진한 정이 이어졌던 것일까? “단순한 고용주와 근무의사 관계를 넘어서 교류와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국립군산대학의 표세만 교수(42세)는 말한다. (마이니치신문 2010. 2. 17.)

 

다카하시 고시로 박사가 찍은 한국의 1930-40년대 농촌풍경

 

거름을 운반할 때 이용되었던 장군

 

족답식 탈곡기를 이용한 벼 탈곡 

  

6) 농장주와 진료소 의사

 

한국 남서부 전북 군산시에 있었던 구마모토농장 진료소에 부임한 이영춘 박사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농장에는 소작인과 그 가족을 포함한 약 2만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진료소에 부임한 1945년 종전까지 10년간 이 박사와 동료가 진찰한 환자는 21만2천명에 이른다. 이 박사는 농장의 경영자인 구마모토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농장에 부임한 후에 5년후에 농촌위생환경 개선을 위한 연구소 설립 허가와 운영자금 제공을 약속받았다.

 

1943년 10월 구마모토씨는 이박사가 제안한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을 인정하여 3,000ha 농장 가운데 1,500ha에서 올린 수입을 운영비로 충당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종전으로 구마모토씨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이 박사는 종전후 고생 끝에 미국과 한국정부를 설득하여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 박사는 종전후 구마모토씨가 별장으로서 사용하고 있었던 농장내 집에 살게 되면서 이영춘 자택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번에 발견한 농장경영기록과 구마모토씨의 편지는 이 집을 혼자서 지키고 있는 이 박사의 5남 이주운(59세) 씨가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이 박사와 구마모토씨가 어떠한 생각으로 농장진료소를 설립한 것일까? 종전, 해방전후 두명 사이에 “약속”을 둘러싸고, 어떠한 행동이 있었던 것일까?

 

“부친은 너무도 바빠서 집에서 얼굴을 본적이 없다. 길에서 만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할 정도의 부자관계였다”라고 이주운씨의 말에서 전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부친과 구마모토씨의 교류를 증명하는 말은 듣지 못했다. 구마모토 농장을 연구하는 국립 전북대학교 소순열(53세) 교수는 “구마모토씨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농장경영 분석, 구마모토씨와 이 박사의 교류를 나타내는 자료수집과 분석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년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이 구마모토씨의 고향인 나가사키현의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식민시대 역사를 사실대로 분석하려고 하는 그들 중에는 “일본의 연구자로부터 보다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2010. 2. 18.)

 

* 신문기사는 농촌진흥청 미래전략팀 이철희 박사가 요약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