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단상/하늘목장 칼럼

무뎌진 영성을 칼날같은 영성으로

곳간지기1 2009. 3. 16. 13:58

"무뎌진 영성을 칼날같은 영성으로"


생명은 살아 있으나, 감각이 마비되면 식물인간이라 부른다.

식물인간이 되면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심장은 뛰고 맥박은 잡히지만..

운동신경도, 언어능력도, 학습능력도, 인지능력도,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온몸에, 감각이 굳어버린 상태이다.

자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게 된다.

이와 같이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다.

요즈음 우리 주변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떻게 저 지경이 되었을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영적 감각이 무뎌지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주님은, 마지막 때가 오면..

'사람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을 것이며..

애곡하여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

요즈음 우리의 시대는, 피리를 부는 사람도 적지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못하고, 누가 애곡하여도 함께 울지를 못한다.

'영적 불감증'에, 걸린 것이다.

애통하고 싶은데 눈물이 말랐고, 춤추고 싶은데.. 이미 굳어 있는 몸을 어쩌겠는가?


세상에서도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할 정도로..

현대인들은, 무감각이 일상이 된듯하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산다'고 하고, '마지 못해 산다'고 하고, '죽지 못해 산다'고, 한다.

죽음에 대하여도, 현실에 대하여도, 위기에 대하여도..

계절의 변화에도, 세월의 빠름에도,

사후의 세계에도, 고난에 대하여도, 하나님에 대하여도, 죄에 대하여도...

도무지, 감각이 없어 보인다.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다.

담대해서가 아니다.

무뎌진 것이다.

마음이 점점 굳어지고, 둔하여 지는 현상이다.

자각능력이, 점차 마비되는 것이다.

그저 본능적인 감각만 겨우 유지하며, 근근이 생명을 이어갈 뿐이다.


어디, 세상 사람들뿐인가?

그렇게도, 영적센스가 충만하던 사람이..

어느날 아침에, 무뎌진 영적 감각을 가지고 나타나게 된다.

마치, 전신마비 된 환자처럼 말이다.

기도에 대한 감각도, 비전에 대한 감각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감사하는 마음도..

하나님에 대하여도, 거룩함에 대하여도, 영혼들에 대하여도..말이다.

육신의 마비도, 하루 아침에 올 수 있듯이..

영적인 무뎌짐도, 이처럼 한순간에 찾아올 수 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면, 삶의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진다.

오히려 육신이 마비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영혼이 마비되면,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되고..

그러고도, 죄책도.. 자책도 못 느끼는, 자각불감증에 걸리게 된다.


전투기에는, 최첨단 레이더 장치가 탑재되어 있다.

그러나 레이더가 오작동하거나 고장난 상태가 되면..

전투기는, 고철에 불과하다.


사단은..

성도들의 감각을 무디게 할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들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적 레이더를 무디고 둔화시켜, 그리스도의 야성을 무력화 시키려는 전략이다.

그것도 서서히, 조금씩..우리의 영적센서를, 무디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겉으로는 전투기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공격 능력도 없는..

여객기도 아니고 전투기도 아닌, 종이비행기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기도를 쉬면 안된다.

하루라도, 은혜의 사각지대에 머물면 안된다.

무뎌지고, 굳어지기 때문이다.

매일 충만해야 하고, 매일 죽어야 하고, 매일 은혜 받아야 한다.

어제의 은혜는, 어제로 족하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다.

신앙은, 현재가 중요하다.

어제나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


목회자가 무뎌지면, 그 교회는 침몰한다.

한 가정의 가장이 무뎌지면, 그 가정은 침몰한다.

지도자가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무뎌지면, 그 나라는 소망이 없다.

물론 인공호흡기 덕분에, 겉으로야 살아있는 듯 보이겠지만..


감각이 무뎌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삶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면, 자살도 서슴치 않게 된다.

생명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면, 살인을 저지르게 되기도 한다.

도덕과 양심이, 이기주의와 쾌락과 물질에 무뎌지면..

가족도, 부모도, 자녀도, 하나님도, 양심도, 도덕도, 안 보이게 만든다.

정신을, 못차리게 만든다.

그러면,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누구의 말도 안듣고, 누구도 못 말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 잃고난 후에야, 비로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가정의 소중함에 무뎌지면, 가정이 해체되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뎌지면, 별 짖을 다 행하고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결혼을 하기도 하고..

음란한 일들을, 행하기도 하고..

부적절한 사랑에 빠져, 헤매이기도 하고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하고..

이중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몇날 며칠을 기도 안하기도 하고, 주일을 범하기도 하고..

평생을 교회를 다니고도, 성경을 한번도 읽지 못하기도 하고..

그리하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이다.


얼마 전에 우리는..

어린 아들을 잠재워 한강에 던져 버린, 비정한 아버지를 알지 않는가?

그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무뎌진 영성은, 실로 무섭고 위험하다.

그대로 방치하면, 큰일이다.


예를 들어

갓난아이를 놔두고 도망가거나, 가정을, 버리는 사람을 볼 때..

정상적인 센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한다..

그러나 정욕과 쾌락과 물질에 눈이 멀어, 감각이 무뎌지고 마음이 둔해지면..

순간, 아무것도 안보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도 가능해진다.

자식도, 아내도, 단란한 가정도, 미래도, 교회도, 하나님도 ..

아무것도 못 보게 하고, 못 느끼게 하는 것이다.

후각이 마비된 경찰견은, 아무 냄새도 찾아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며..

사지가 마비된 사람에게는..

주사를 놓아도.. 꼬집어도, 아프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목회자가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영적감각이 무뎌지고 마비되면,

불신자와 다를 바 없고, 더 큰 죄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셉의 센서를 보라.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도, 그의 감각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그래서,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을 보라.

목욕하는 자매를 보는 순간, 다윗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자매를, 범하기 전에..

다윗의 영적 감각은, 이미 무뎌져 있었거나.. 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손의 최후를 보라.

우리도 영적 감각이 무뎌지면..

머리카락 잘린 삼손과 같이 비참한 삶을 거두게 된다.


요즈음, 교인들의 영적 감각이 대단(?)하다.

교회들의 무뎌진 감각이 대단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대단한 영성(?)을 소유하고 있다.

바울이나 모세나, 예레미야나 믿음의 사람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민족이 악을 행할 때..

그 시대의 황무함을 바라볼 때..

골육친척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을 때..

어려운 이웃들을 만날 때, 눈물이 강을 이루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적센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점점, 우리도 모르게 무뎌지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조차, 감각이 별로 없는듯하여 서글프다.

매스컴에서 누가 죽었다고 해도..

나라가 어렵다고 해도..

누가 고통 가운데 있다 하여도

옆집에서 누가 굶는다 해도..

불쌍한 사람들이 이웃에 살아도..

누가 도와 달라 하여도..

전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듯하여,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눈이 짓물러 있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무감각, 무감동, 무관심, 무절제, 이 네가지는..

말세에, 외식하는 신자들의 두드러진 현상이 아닐까?


내가 아는 형제는, 뉴스를 못 본다고 한다.

왜냐하면 뉴스를 볼 때마다, 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기구한 사연으로, 하루가 천년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운다는 것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말씀을 적용하는 사람이다.

'명품센서'를 소유한, '명품신자'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무뎌지고 굳어가는, 영적 감각을 회복해야만 한다.

찬송을 불러도, 말씀을 들어도, 예배를 드려도, 십자가를 묵상해도, 기도를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허수아비 신자이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영혼을 자각해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짐승같다고 했다.

무딘 감각과 굳은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는..

언젠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말게 된다.


칼집 없는 칼도 문제지만, 무뎌진 칼은 더 큰 문제이며 오히려 짐이 된다.

고구마도 못 깍을 정도로 녹슬고 무뎌진 칼을, 칼이라고 말할 수 있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한 칼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피리를 불 때 춤을 추어야 하고, 누가 애곡하면 함께 통곡이라도 해야 한다.

잔치집보다 초상집에, 마음이 늘 있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 영혼을 위해서이다.

그것이, 주님의 식이다.


불신자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무뎌진 칼을 가지고 다니며 폼(?)잡는 성도이다.

튼튼한 칼집과 예리한 칼만이, 마귀를 쓰러뜨리며, 역경을 지치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에 담아 놓으신 성령의 레이더만이

적을 이기고, 나를 지킬 수 있는 비밀병기가 될 수 있다.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래되고 세련된 칼집(오래된 믿음이나 직분)이 아니다.

투박하더라도 예리하게 날이 선, 칼날(영성)이다.

주님의 뜻은, 무뎌지고 굳어지고 둔화된 우리의 영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고난의 목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주님은 오늘도, '교회골목'마다 다니시면서 목청껏 외치신다.

"칼~ 갈아요!"


♣ 주님..

점점 무뎌지고 굳어져 가는

우리의 마음들과 영성을, 기경하여 옥토 되게 하시며

피리를 불 때 춤추게 하시며, 애곡할 때 함께 통곡하게 하소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이듯,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느끼고 품게 하소서.

더 이상은 무뎌지거나 굳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광풍가운데로 보내시든지

풀무 가운데 넣어서라도 잠들지 않게 하시며, 마비되지 않게 하소서.

마비되어 지옥 가느니, 차라리 풍랑 속에서라도 깨어 있다가 천국백성 되게 하소서.

오래 묵은 칼집을 십자가 앞에 태워 버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칼날을 세워

날선 검으로 마귀를 멸하게 하소서.

주여! 나의 무뎌지고 녹슨 칼을, 시퍼렇게 갈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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