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본질과 지식의 통섭(統攝)
The Nature of Life and Consilience of Knowledge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엄격하게 그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학문의 구획이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이란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그 때 그 때 편의대로 만든 것입니다. 진리는 때로 직선으로 또는 때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학문의 울타리 안에 갇혀 진리의 한 부분만을 붙들고 평생 씨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진리의 행보를 따라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의 국경을 넘을 때마다 여권을 검사하는 불편한 과정을 생략할 때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세계화는 진리를 추적하는 학문의 영역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통합(integration)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생물학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생물학은 생물의 거의 모든 걸 두루 연구하는 박물학 즉 자연사(natural history)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학문입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카를 폰 베어, 에른스트 헥켈 등의 연구로 발생학(embryology)이 생물학의 중요한 한축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유전학(genetics)은 20세기에 들어와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되고 분자생물학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다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자연사는 꾸준히 넓은 의미의 생태학 또는 야외생물학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20세기 생물학은 크게 보아 자연사, 유전학, 실험발생학의 세 분야로 나뉘어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최근에 들어 사뭇 학제적으로 통합적인 성격을 띤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이보디보(Evo-Devo))이 등장했습니다. 이보디보는 표면적으로는 발생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의 만남이지만 실제로는 생화학, 생물물리학, 세포생물학, 유전학, 생리학, 내분비학, 면역학, 신경생물학 등 생명 현상의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기능생물학(functional biology) 분야들과 행동생물학, 생태학, 계통분류학, 고생물학, 개체군유전학은 물론, 세균학, 균학, 곤충학, 어류학, 조류학 등의 개체생물학(organismic biology)들을 포함하는 이른바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 분야들이 통합되어 생명현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종합학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른바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연구라는 걸 한답시고 적지 않은 시도들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대부분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이 제각기 일방적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전체에 보태는 사뭇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인 유희 수준을 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실로 서 말의 구슬을 꿰는 범학문적(transdisciplinary) 접근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05년 하버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Edward Wilson의 명저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1988)>를 <통섭-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내놓았습니다. 'Consilience'는 19세기 영국의 자연철학자 William Whewell(1794-1866)이 1840년 <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에서 처음으로 소개한 것을 무려 한 세기 반 후에 윌슨 교수가 새롭게 부활시킨 개념입니다. 그걸 저는 ‘통섭(統攝)’이라는 그릇에 담았습니다. Consilience 즉 통섭은 한 마디로 말해 다양한 학문 분야들을 가로지르며 사실과 그 사실에 기초한 이론들을 한데 묶어 공통된 하나의 설명체계를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을 번역하는 5년 내내 저는 Consilience를 어떻게 번역하여 우리 학계에 소개할까 무척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제가 옮긴이 서문에 밝힌 대로 1년이 넘는 그야말로 참빗으로 이를 잡는 서캐훑이 끝에 캐낸 단어가 바로 ‘통섭(統攝)’입니다. 서양에서 consilience가 생소한 단어인 만큼 통섭도 우리에게 퍽 생경한 단어입니다. ‘Consilience’는 두툼한 영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윌슨 선생님도 ‘coherence(일관성, 일치)’ 같이 사람들에게 이미 친숙해져 있는 단어를 택하지 않고 굳이 consilience를 택한 이유를 오히려 희귀하여 그 의미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도 똑 같은 이유로 ‘일치’, ‘합치’, ‘합일’, ‘통일’, ‘통합’과 같은 단어들을 붙들고 숙고하다 우리말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 ‘통섭’을 택했습니다. 새로운 단어를 소개하며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통섭’은 불교학이나 도교학에서는 심심찮게 사용해온 용어입니다. 특히 원효의 화엄 사상에 관한 해설에 자주 나옵니다. 조선 말기 실학자 최한기의 기(氣)철학에도 종종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총괄하여 관할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삼군(三軍)을 통섭한다’는 방식으로 쓰기도 합니다. 통(統)은 ‘큰 줄기’ 또는 ‘실마리’의 뜻이고, 섭(攝)은 ‘잡다’ 또는 ‘쥐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둘을 합치면 ‘큰 줄기를 잡다’는 의미가 됩니다. 휴월이나 윌슨 선생님이 이런 동양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이 단어를 쓰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consilience(통섭)’는 학문의 경계는 물론 동서양의 경계도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개념인 듯 합니다.
저는 지난 봄 그 동안 몸담았던 서울대의 안락함을 박차고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학문의 통섭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을 감행했습니다. 제가 하는 생물학인 행동학과 생태학은 특별히 통섭적인 접근을 요하는 학문입니다. 생명이란 워낙 복합적인 현상이라 여러 분야가 한데 모여 통섭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크고, 깊고, 느린 생물학”을 하기 위해 이화여대에 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연구실 한 구석에 ‘통섭원(統攝苑 The Garden of Consilience)'이라는 작은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여러 학문에 종사하는 분들이 한데 모여 자유분방한 학문의 굿판을 벌일 수 있는 공간으로 키워갈 생각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교수)
통섭(統攝, Consilience)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학문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관점은 그리스 시대에는 하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점차 분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편 통섭이론의 연구방향과 반대로, 전체를 각각의 부분으로 나누어 연구하는 환원주의도 있다.
1840년에 윌리엄 휘웰은 귀납적 과학이라는 책에서 "Consilience"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통섭의 귀납적 결론은 사실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분야를 통한 결론에 의해 얻어진 귀납적 결론이 또 다른 분야에 의해 얻어진 결과와 일치할 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은 어떤 것에 대해 발생한 사실을 해석하는 이론들을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귀납적 결론이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야만 통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각 지식의 분야들은 각각의 연구분야의 활동에서 얻어진 사실들에 기반하여 연구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들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연구분야의 활동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원자물리학은 화학과 관련이 깊으며, 화학은 또한 생물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신경과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각 분야의 다양한 접합과 연관은 이루어져 왔다.
통섭이란 말은 20세기말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1998년 저서 《통섭, 지식의 대통합》을 통해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생물학(1975)》을 저술한 인본주의적 생물학자로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간격을 매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는 또한 C.P 스노우의 1959년 작 <두 문화와 과학혁명>에서도 다루어진 바가 있다. 윌슨은 과학, 인문학과 예술이 사실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리된 각 학문의 세세한 부분을 체계화시키는 데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모든 탐구자에게 그저 보여지는 상태뿐만이 아닌 깊이 숨겨진 세상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간단한 자연의 법칙들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연구하지만 오히려 환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것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윌슨의 제자인 이화여대의 최재천 교수가 《통섭, 지식의 대통합》을 번역하여 한국에 통섭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였다. 통섭이라는 단어는 성리학과 불교에서 이미 사용되어온 용어로 '큰 줄기를 잡다'라는 뜻을 지닌다.
한편 상지대의 최종덕 교수는 한국의철학회에서 통섭이 마치 학문간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양방향적 관점의 합일로 오해하게 하고 있으나, 원래 윌슨의 개념은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흡수되는 통합을 의미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2006년 창립된 한국의철학회는 의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학문과 실천과 덕성으로 구성된 의(醫)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하고 학술지와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웬델 베리는 그의 책 《삶은 기적이다》에서 윌슨의 위 책 《통섭》이 기계적 환원주의에 근거해서 세계를 파악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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