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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PIA가 농촌진흥청에서 차지하는 사업영역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 파급력은 상상이상이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서 세계의 식량문제 해결에 앞장서 국격(國格)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콩고에 가지고 있는 인식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내전과 독재정치, 말라리아, AIDS, 빈곤... 우리가 알고 있는 콩고는 부정적인 인식이 짙고, 그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나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표면적인 것이며, 그 안을 세세히 들여다 보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R콩고는 우리나라의 60년대와 닮아있다. 식민지를 경험했고, 내전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부정부패로 인해 시설기반이 많이 무너져 있다. 그러나 국토면적이 크고 많은 지하자원을 확보하고 있고, 경지면적은 국토의 3% 내외에 불과하나, 경작지 개발가능 면적은 세계2번째로 잠재력이 높다.
아프리카의 중앙에 위치한 콩고민주공화국 농촌진흥청에서 실시하고 있는 KOPIA(Korea Project on International Agriculture) 사업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맞춤형 기술지원과 자원 공동개발을 통한 지속적 농업기술 협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24일 농촌진흥청의 국립식량과학원을 방문해 박평식 DR콩고 코피아센터 초대 센터장을 만났다. 박소장님은 세계 25개국을 다니며 식량연구에 일임하셨고, 지금도 농업경제학 박사로 농업연구관으로서의 삶을 업으로 살고 계신다. 박소장님은 우리나라가 60년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세계최초의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시며, 우리가 받았던 것을 세계에 돌려주는 것이 도리이고, 우리의 기술력이라면 충분히 콩고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KOPIA센터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다. “4년전 있었던 농촌진흥청 개편요구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우리나라가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서 세계를 위해 할 일을 찾은 것이지요...” KOPIA 콩고센터 프로젝트 현장에 농업기술협력사업 간판을 세우니 관심과 기대가 더 커졌다. “우리청에 대해 4년 전에 민영화해라, 개편해라 하는 요구가 많았는데, 우리가 스스로 국민에게 농진청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그 과정에서 국내 농업문제도 중요하지만 세계 식량문제에도 기여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지요.” 박 소장님께서는 농진청의 노력으로 할 일을 찾았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서 세계를 위해 할 일을 찾았다고 하셨다.
식량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아프리카의 4개국(케냐, 알제리, 에디오피아 등) 중에서도 빈곤률이 세계최고를 가리키는 콩고를 선택하게 되었고, 아프리카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세계 식량난 극복을 위해 기여할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4년 전 정부는 농촌진흥청을 민영화 대상으로 논의될 즈음 세계적으로 식량위기가 닥쳐와 식량의 중요성을 깨닫고, 농업 분야가 자원공동개발 시스템으로 국부를 진작시키고, 한국의 국제적 신뢰도 및 국가 브랜드가치를 향상시키는 방편이 되었다.
“하루 한 끼 먹는 것이 대부분이고 두 끼를 먹을 정도면 부자에 속하고... 박사님은 콩고의 빈곤현실에 대해서 “하루 한 끼 먹는 것이 대부분이고 두 끼를 먹을 정도면 부자에 속하고, 세끼를 모두 챙겨먹을 정도면 때려죽일 놈이다.”라고 농담을 건네셨다. 그 정도로 콩고의 현실은 아득했다. 일례로 콩고의 서울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킨샤사대학교의 학생은 2만5천 명 가량이다. 하지만 이 큰 대학에 식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점심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장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식당자체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빵이나 열대과일로 끼를 때우거나, 집에서 먹고나오는 한끼의 밥 혹은 일터에서 먹는 한끼의 간편식으로 하루의 식사를 대한다고 전했다. 이토록 빈곤을 겪는 국가에게 식량해결은 그 어떠한 문제보다도 우선시 되야 할 것이 자명해 보였다.
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콩고 땅에서 소장님께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맨땅에 헤딩을 하듯 소장님은 대학구내 산지 3.2ha 사용허가를 받고 연구농장 시설을 계약했으며, 연구센터 2층 건물을 신축했다. 건물과 농장시설의 기본설계도 직접 맡아 하실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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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지의 땅에서 희망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KOPIA DR콩고센터는 식량작물 연구 사업에서 콩고 식량자급 지원을 위한 옥수수 적응성 시험을 추진하고 씨감자 종자증식 사업도 시작했다. 또한 원예작물 연구 사업에서도 차광막을 설치한 시설하우스를 설치해 오이, 토마토, 고추, 무, 배추 등을 재배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문화교류를 통한 한국소개 또한 빠질 수 없었다. 한국어 문화강좌를 지원하고 한식 세계화 기반조성으로 한글학교를 연계하기도 했다.
“현지의 높은 물가와 마무리가 부실한 문화,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 등은 KOPIA센터 설립운영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DR콩고 땅에 주어진 것은 3.2ha의 야산뿐이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물가는 여타 아프리카 국가와 비교했을 때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내전과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UN군이 콩고에 거주하게 되었다. 킨샤사 시내에 거주하는 많은 군인들이 거주할 곳과 먹을 것이 부족하자 시내에 주택가격은 하늘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또한 토지는 많지만 농업기반이 허약한 나라에서 해외군인들은 각종 샐러드와 고기를 원했고 이는 모두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현지 경제사정과 상관없이 물가는 고공행진을 기록했고 이러한 상황은 굳어지게 되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자재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우스를 짓는 철골은 수도관 파이프를 가지고 만들었고, 하우스를 잇는 재료를 구할 수 없어 DR콩고 시내를 이 잡듯 뒤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또한 최빈국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도난사고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우스 건축자재는 물론이고 자동차의 백미러 도난부터 주차된 차량에서 노트북을 도난당한 사고까지 크고 작은 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박소장님은 굴하지 않았다. 6개월의 임기를 다 마치고도 벌여놓은 기반조성 사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연장신청을 하셨고, 농진청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KOPIA 사업을 오지에 뿌리내리기 위해 힘쓰셨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니하오’라고 인사하던 현지인들은 6개월 뒤 모두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지요.”
현지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소장님은 많이 변화 했지요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소 닭 쳐다보듯 너희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자 이렇게 나왔어요, 우리나라 사람을 볼 때 중국 사람인줄 알고 ‘시누아, 니하오’로 인사를 하고 장난을 치곤 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센터 건물을 짓고 농장을 만들고 나니,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디렉터, 디렉터” 부르며 따라다녔다.
또한 “킨샤사대학에서 개설한 한국어 강좌에서 KOPIA가 DR콩고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하자 지도 끝에 있는 작은 나라 한국을 짚으며 ‘꼬레아’를 외치더라구요.”라고 말씀하셨다. 현지의 사업시작은 쉽지 않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사람들의 태도는 많이 변화하였고, 한국을 알리고 한국을 드높이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반 서민뿐 아니라 DR콩고의 장관과 언론들은 KOPIA 센터를 방문해 열심히 취재하기도 했다.
교육부 장관과 킨샤사대학 총장이 참여한 기공식에 많은 취재진이 몰려와 취재하고 있다. 그린하우스 등 연구시설 계획을 설명하자 다른 대학에도 세워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먹거리를 다루는 농업은 우리의 생활이지요.”
나당연합군으로 고구려를 무너뜨리며 위용을 떨치던 당나라는 한 노비의 반란이 도화선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당나라 말기의 가혹한 정치도 문제가 되었지만 가장문제가 되었던 것은 빈곤이었다. 황소가 난을 일으키며 “왕족의 씨앗이 따로 있느냐!” 라고 일갈 한 것도 모두 먹을 것이 해결되지 못했기에 발생했다.
박 소장님께서는 우리나라의 1997년 외환위기와 인도네시아를 말씀해 주셨다. 인도네시아는 그 당시 40년 동안 유지되었던 정권이 무너졌다. 그들의 먹을 것이 보장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먹거리에서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전체 식량자급률은 25% 내외이지만, 주식인 쌀이 100% 자급되고 있어 실질적인 식(食)에서 큰 타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식량자원의 자급도 중요하지만, 식량자원이 부족한 우리는 해외식량기지 개발도 중요한 과제다. 우리가 그들의 나라를 도와주기 위해 콩고를 향하지만, 내면에는 급할 때 우리가 그들의 땅과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전초기지로서 우리는 그러한 마인드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소장님의 연구실 책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소장님과 인터뷰한 시간은 2시간이 조금 못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농촌진흥청에서 실시하는 KOPIA(해외농업기술개발센터)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의 농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국격과 국부를 높이는 사업으로 문화를 일컫는데 그것은 농업의 잠재력을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보여지는 농촌진흥청의 방향은 농업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이 세계에 우리 대한민국을 알리는데 최적의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 박평식 박사님은 농업과 식량문제를 주제로 ‘농업은 생명창고’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신다. 거기에 척박한 땅 DR콩고에서 KOPIA 사업을 개척한 이야기며, 쌀사랑이라는 닉네임에 어울리게 식량과 농업에 대한 다양한 읽을거리가 있다. http://blog.daum.net/psp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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