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줄서도 빈손” 분노…창고마다 총 든 군인 | |
파키스탄 3500만명 영양결핍…가격폭등 탓 폭발직전 필리핀, 쌀 보조금 급증 재정악화…전세계 확산 우려 | |
류이근 기자 김기성 기자 | |
지난 5일 오후 파키스탄 남쪽 최대 도시 카라치 페리어시장. 부르카로 온몸을 뒤집어쓴 60대 노파가 ‘유틸리티 스토어’(정부 운영 생필품 가게) 앞에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함께 있던 이브라힘(45)은 “질이 제일 나쁜 밀가루도 3개월 사이 3배가 올랐는데 이것도 못 사냐”고 목청을 돋웠다. 섭씨 42도의 땡볕 속에서 60∼70여명의 주민들이 줄을 선 채 언제 열릴지 모를 가게 문 앞을 지켰다.
카라치에서 식료품 가게 앞은 식량을 구하려는 주민들간에 고함과 몸싸움이 오가는 전쟁터로 변했다. 식량창고 주변에는 식량 강탈을 막기 위해 총을 든 군인들이 배치돼 있다. 영양 결핍 인구가 3500만명인 파키스탄에서 식량위기는 사회불안으로 바뀌고 있다. 무하마드 사비르 <데일리 카라치> 편집인은 “식량값이 폭등하면서 사회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식량위기가 계속되면 예상치 못한 혼란을 빚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식량위기는 식량수출국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3~4위 밀 수출국인 카자흐스탄 최대도시 알마티에서 가장 큰 악사이난 빵공장. 지난 9일 이곳에서 나오는 650g의 벽돌 모양 빵은 지난해 50텡게(1텡게는 약 8원) 안팎이었지만 60~70텡게에 팔렸다. 베르디베크 사파르바예프 노동사회복지부 장관은 “식량값 상승으로 인구 1600만명의 카자흐스탄 인구 중 300만명(18%) 이상이 고통받고 있다”며 사회불안을 우려했다.
세계 1위의 쌀 수입국으로 올 270만t의 쌀을 수입해야 하는 필리핀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노동절인 지난 1일 마닐라 대통령궁 앞에 몰려든 1만5천명의 노동자들은 “아로요 대통령은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음식과 일자리’라는 펼침막을 펼친 채 행진을 벌였다. 핏 핀락(41) 필리핀장거리전화국(PLDT) 노조위원장은 “정부가 당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식량 구호 확대에 나서라”고 말했다.
식량값이 뛰자 필리핀 국립식품청(NFA) 남부사무소는 지난 4월 초부터 1명당 하루 5㎏의 수입쌀을, ㎏당 시중가(31~34페소)의 거의 절반 가격인 18.25페소(1페소는 약 24원)에 팔고 있다. 최근 쌀값이 50%나 뛰면서 지난 1일 이곳에서만 하루 7천명이 줄을 서서 싼값에 쌀을 사갔다. 쌀 판매소와 운반하는 곳마다 총으로 무장한 필리핀 정규군이 배치돼 삼엄한 경계를 섰다. 필리핀 사회복지부는 2500개의 정부 보조미 판매소를 마닐라에 설치한 데 이어 마닐라에 살고 있는 월 5천페소 미만의 70만 가구를 대상으로 카드를 발급해 빈곤층이 안정적으로 정부 보조미를 살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쌀과의 전쟁’은 필리핀 정부의 재정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베트남과 타이 등지에서 쌀 1㎏에 약 1달러를 주고 수입해 3분의 1 가격에 팔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6500만달러였던 쌀 보조금이 올해 15배나 증가한 10억달러를 넘어서면서 2006년의 정부 재정적자에 육박하고 있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WB) 총재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 세계 33개국이 식량값 급등으로 심각한 혼란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중남미 카리브해의 가난한 섬나라 아이티에서 지난달 식량값 폭등으로 1주일째 항의 시위가 이어져 6명이 넘게 숨지면서, 자크 에두아르 알렉시스 아이티 총리가 사임했다. 지난 5일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서는 곡물가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5명이 숨졌다. 이 밖에도 카메론, 이집트 등 세계 곳곳에서 ‘식량 전쟁’이 이어졌지만 이 전쟁은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존 홀름스 유엔 인도지원 담당 사무차장 겸 긴급구호 조정관은 지난달 “식료품값 폭등 추세가 사회불안을 빠르게 확산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알마티 마닐라 카라치/ 류이근 김기성 기자 ryuyigeun@hani.co.kr
“쌀값 폭등은 국제시장 왜곡 탓”
“필리핀 전체 인구의 35% 정도가 쌀값 폭등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가즈유키 쓰루미 유엔식량농업기구(FAO) 필리핀 소장은 세계 1위 쌀 수입국인 필리핀의 최근 식량위기에 대해 “공급 부족이 아니라 국제시장에서 쌀값이 결정되고 있는 현재의 곡물가 결정 구조에서 비롯된 ‘가격위기’의 성격이 짙다”고 말했다.
쌀 자급율 90%인 필리핀에서 전체 인구 9천만명의 연간 쌀 소비량은 약 1200만t. 쓰루미 소장은 “2007년에도 전년 대비 식량생산량이 4% 늘어났고, 국내 생산량과 수입량 200만t을 합하면 충분한 공급량인데도 최근 몇달간 필리핀 내수시장에서의 쌀값은 정반대로 미친 듯이 뛰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쓰루미 소장은 이런 식량값 상승 원인으로 기름과 비료값 등 생산비와 운송비의 인상 및 국제곡물가 급등을 꼽았다. 그는 “옥수수를 원료로 사용하는 바이오 에너지 확대 영향은 그리 크지 않지만 정작 생산량을 늘려줄 경작지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러한 식량위기가 일차적으로 주로 가난한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가 이제는 중산층을 빈곤층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상황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쓰루미 소장은 또 “식량위기는 쌀 수출국인 베트남, 태국, 인도, 중국, 캄보디아 등의 쌀 값 상승에서 보듯 필리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로, 전지구적 해결 과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류이근 기자
풍요 속의 식량위기 원인은? 생산량 충분 ‘분배에 문제’
‘맬서스 인구론’ 현실과 달라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는 1798년 쓴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인구는 ‘1, 2, 4, 8, 16 …’으로 늘어나는 반면, 식량은 ‘1, 3, 5, 7, 9 …’로 증가한다. 필연적으로 25년마다 두배가 되는 인구와 그렇지 못한 식량 사이에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최근 세계 식량위기 속에 ‘인구론’이 부활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인구론을 바탕으로 농업 생산력이 지구촌 인구와 ‘이머징 마켓’ 등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식량위기가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식량위기를 겪는 필리핀 인구 증가율은 지난 10년간 평균 2.3%로 해마다 거의 100만명씩 늘었다. 반면 필리핀의 쌀 생산량은 같은 기간 매년 평균 4.4%씩 성장했다. 식량생산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앞질렀지만, 정작 쌀을 제대로 사기 어려운 계층은 전체 인구의 25~30%에서 35%안팎으로 늘었다. 올해 사상 최대 풍작이 예상되지만 세계 37개 국가 21억명이 당장 식량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 장 지글러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1984년 당시 세계 농업 생산력을 기준으로 120억명을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했다”며 “식량이 제대로 분배된다면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세계 식량위기를 ‘가격 위기’ 또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하는 이유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빈곤과 기아>에서 “식량 공급량의 감소보다 임금 감소, 실업, 식량가격 상승, 식량배급 체계 미비 등의 수많은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회 내 특정 집단의 기아를 유발시킨다”고 기근의 원인을 설명했다.
류이근 기자 |
기사등록 : 2008-05-21 오후 06:2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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