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코로나 종식에 대한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이러스 자체는 통제 가능한 수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위기가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다. 특히, 가장 우려되는 것이 식량문제다. 전 세계 전문가들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곡물 생산 부족이나 유통망 봉쇄가 가져오는 위기는 국가안보 차원으로 인식된다. 곡물 공급 부족으로 붕괴된 구소련이 대표적이다. 1979년 미국이 취한 1,700만 톤의 밀·옥수수 소련 수출금지 조치가 소련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수년 전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의 붕괴도 곡물 부족으로 인한 식료품 가격 폭등에서 시작됐다.
들썩이는 국제 곡물 시장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5월 중에 '식량 위기'가 올 것을 예고하고 있다. 위기 원인은 식량생산 부족과 가격 폭등, 비축과 유통망 위기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아프리카가 기후변화에 따른 사막 메뚜기떼 출현으로 식량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미 국제 곡물 시장에는 충격파가 전달되고 있다. 국제 쌀 가격이 급상승하고 있고, 공급망도 흔들린다. 미국산 중립종 쌀 가격은 전년 대비 11.2% 상승했다. 세계 3위 쌀 수출국인 베트남은 지난달 쌀 수출을 중단했다가 최근 물량을 대폭 줄여 재개했다. 베트남의 쌀 수출 감소가 계속되면 세계 쌀 시장 공급량이 10~15% 가량 줄어들 전망이다. 캄보디아의 쌀 수출 금지, 러시아의 밀 수출 축소, 중국의 쌀·밀 비축 증가는 곡물시장 위기를 증폭한다.
축산물·수산물 파동도 우려된다. 베트남·인도·러시아·프랑스 등에서 먹을거리 수출 중단이나 수출 제한 등의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곡물 가격이 장기적으로 상승하거나 식료품 사재기가 일어나 수급 상황이 더 악화되면 강력한 수출 금지를 단행할 것이다. 국경 이동 제한으로 농사를 지을 사람도 부족하다. 노동자들의 이동 제한으로 미국·유럽에서 과일과 채소 수확이 어려울 전망이다. 노동력 부족이나 공항·항만 등 수송망 차질과 심리적 요인도 식량 파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식량 위기는 자연재해나 질병 위기보다 더 심각하다. 곡물 수출 시장이 문을 닫으면 '돈이 있어도 못 사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쌀을 비롯한 국제 곡물 시장은 '얇은 시장(thin market)'이라 불린다. 수요·공급이 약간만 변해도 가격이 하늘과 땅을 오갈 정도로 요동친다. 빈곤한 국가를 더 가난하게 만든다. 유엔식량계획(WFP)은 아시아·아프리카·중동의 빈곤한 49국 2억7000만 명이 심각한 고통을 받는 것으로 추정한다. 식량위기가 장기화되거나 바이러스 등 다른 위기와 겹쳐 일어나면 속수무책이다. 국가 간 전쟁에 버금가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취약한 식량 수급 구조
'보릿고개'라는 말이 보여주듯 우리 민족은 5000년 동안 배고픔으로 고통을 당했다. 먹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된 것은 불과 30년 전 통일벼 개발 이후다. 그러나 우리나라 식량 수급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하다. 수요량에 비해 공급량이 너무 부족하다. 연간 곡물 수요량은 약 2100만톤이나 생산량은 450만톤 수준이다. 자급률은 22%에 불과하다. 부족분 1600만톤 정도를 매년 수입해야 한다. 이 중 1100만t톤 정도가 사료용이다. 축산물 소비가 많아 사료용 곡물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급률은 보리 31.4%, 콩 6.3%, 밀 0.7%, 옥수수 0.7% 수준이다.
쌀은 그나마 자급률이 높은 편이지만 이마저 안심할 수는 없다. 해마다 농지가 도로나 주택, 공장이나 창고 용지로 전환돼 2만㏊ 정도가 줄어든다. 식량 수출 국가가 문을 닫으면 우리 국민의 먹을거리가 당장 위협받는 구조다. '현재 곡물 수급 상황이 안정적이다' '비상시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국가 위기 대비한 비상 대책
식량위기가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당장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선 식품 수급 상황과 비축 물자 공급 상황을 점검해야 한다. 주식인 쌀 비축 규모는 전체 소비량의 17~18%인 72만톤 정도다. FAO 권장 수준이다. 그러나 이는 평시 상황을 전제로 설정한 물량이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 비축량을 늘려야 한다. 비용이 추가로 소요될 것이나 감수해야 한다. 또 품목별 수급 상황을 장관이 직접 챙기고, 대통령 주재 점검회의를 통해 부처별 협조 체제를 살펴야 한다.
매점매석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통망을 점검하고 비상 대비 훈련도 필요하다. 복합적으로 닥쳐올 위기에 대비해 독립적인 위기관리센터를 설치해야 한다. 식량의 공공 비축과 수입 관리, 해외 곡물 수입망 확충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단된 '국가 곡물 조달 시스템'을 재추진해야 한다. 중장기 식량 안정 공급을 위해 농업 생산 기반을 확충, 우량 농지를 보전해야 한다. 농업 기술 개발과 품종 혁신, 비료, 농약, 농기계 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
'코로나 19' 사태는 세계 질서를 바꿀 기세다. 정부 차원의 '태스크 포스' 구성으로 대처하기에는 미흡할 수 있다. 수많은 인종과 국가, 기관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한 개별 국가의 힘만으로 대처하기도 어렵다. 국제적 협력 체제 구축, 국내 대책 마련, 국민의 협조가 조직 플레이 하듯 이뤄져야 한다. 위기가 심각하고 복합적일수록 정부의 대응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기다. [조선일보, 2020년 4월 29일 3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