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단상/하늘목장 칼럼

베드로의 탁월한 영적 센스

곳간지기1 2008. 7. 28. 09:08

 "베드로의 탁월한 영적 센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기를 주신다.

이유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같은 시험을 주신다.

이유는.. 생수같은 축복을, 더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앞길을 꽉꽉 막으신다.

이유는.. 활짝 열어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깊은 웅덩이에 빠뜨리신다.

이유는.. 건져 내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여도, 한 마리의 고기를 못잡도록 하신다.

이유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기 위함이다.


문제는.. 막히고, 안되고, 웅덩이에 빠지고, 위기를 만났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그럴 때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도 의지하고, 사람도 배려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열리고, 잘되고, 형통하고, 고기가 아주 잘 잡힐 때이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일에, 선수이다.

그런데.. 지난밤,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 위기가 계기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시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돌항아리 아구까지 물을 채우라 하셨듯이..

우리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고 싶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처절하게, 실패하는 것이다.

세상말로, 알거지가 되어야 한다.

그 후에.. 말씀을, 아구까지 채워야 한다.

이것은, 영적인 순리이다.


우리는, 조급하다.

우리는, 다급하다.

그래서.. 해결을 원하고, 기적을 바라고, 형통을 사모하고, 축복을 갈망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보다 더 높은 가치와, 비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당장 고기 몇 마리 잡는 것으로, 우리에게 반응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한 마리의 고기도 못잡도록 기다리시는 중이기 때문이다.

무얼 해도 안되고, 어디서 해도.. 안되게 하신다.

금식을 하고, 철야를 해도, 교인이 한명도 나오지 않는다.

밤을 지새우며, 돈을 버는데도.. 모이는 돈은 없도록 하신다.

건강을 위해, 별의 별짓을 다 해도.. 자꾸만 약해진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 때이다.


망할 것이면, 빨리 망함이 축복이다.

안될 일 같으면, 빨리 안됨이 축복이다.

아프려면.. 쎄게 아픔이 은혜이다.

그래야.. 자기를 제대로 발견하는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음성이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무슨 소리도 안들린다.

누구의 말도, 안 듣는다.


베드로의 축복은.. 처절한 실패로 인해, 주님의 말씀을 차분히 앉아 들을 수 있었음이다.

주님 편에서 보면..

이제 베드로는.. 축복받을 준비가 되었고, 응답받을 그릇이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게 안 잡히던 고기가, 한번의 그물질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히게 되었다.


자..이때부터, 또 문제이다.

고난당하지 않은 사람의 시야는 의외로 좁다.

자기밖에 안 보인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당한 직후였기에 다른 배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게 되자 한 마리라도 더 배에 담으려고 욕심부리지 않고 다른 배들을 불렀다.

그리고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베드로의 축복 조건이다.


우리는 내 배만 안고프면, 남의 배고픈 것은 별로 모르고 산다.

우리는 내 가족만 안전하다면, 남의 가족의 아픔을 외면하고 산다.

우리는 내 교회만 잘되면, 남의 교회는 텅텅 비어 있던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내 자녀만 잘 되면, 남의 자녀들이야 어찌되었든 무관심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베드로적인 사고가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가 만선일 때, 한 마리의 고기를 못잡아 울상되어 있던..

다른 동료들의 표정을 읽는, 센스를 소유했다.

그래서 빈 배가 만선일 때 '할렐루야' 소란 떨지 않았다.

조용히 저들을 불러 함께 더불어 나누어 가졌다.

여기에 진정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기독교의 고차원적인 가치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우리가 베드로의 그릇과 영성을 따라갈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나보다 남의 아픔을, 나보다 남의 고통을 나보다 남의 불행을 더 아파하는 베드로적 사고를 소유한,

기독인들이 절실한 때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춤을 추는 성숙한 성도들이 많아야, 기독교의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다.


내 교회보다, 남의 교회가 부흥될 때, 더 즐거운 목회자..

내 자식보다 남의 자식이 더 잘될 때, 진정으로 축하해주는 성도..

마지막 남은 양식.. 맛난 음식 만들어, 선지자를 섬겼던 사렙다 과부같은 센스를 소유한 기독인들이 많아질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속히 임하리라.


빈 배가, 만선되고 싶은가?

빈 그물이 찢어지는 그물 되도록, 많은 축복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베드로의 인사이트와 센스를 소유하라.

그러지 않고서..

받은 축복은, 저주이며..

누리는 영광은, 추함이며..

성취한 성공은, 망함이리라.

그런 복은.. 모래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홍수나면..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조급할수록, 다급할수록.. 베드로의 센스를 본받으려 엎드려라.

오히려.. 실패가 성공이며, 막힘이 열림이며, 위기가 기회이며, 고난이 유익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