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해외 여행/중앙 아시아

[카자흐7] 카자흐스탄 고려인에 대한 속설

곳간지기1 2008. 12. 24. 15:18

 

카자흐스탄에 고려인이 있으니 시장에 김치도 있고 평판도 좋았다

 

중앙아시아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부족한 식량확보를 위한 해외농업 개발환경을 조사하러 갔기 때문에 정부기관과 농업회사도 많이 찾아다녔지만, 틈나는 대로 농산물 시장도 누비고 다녔다. 땅이 많으니 곡물과 육류는 자급하지만, 과일과 채소류, 공산품 등은 주변의 우즈벡이나 중국, 러시아 등으로부터 수입된 상품도 많았다. 물론 앞에서 썼지만 전자제품과 자동차 등은 한국제품도 많이 진출해 있었다.

 

낯선 외국에 가면 재래시장을 찾아다녀야 전통적인 정겨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 나라는 사회주의였던 국가여서 그런지 주거지 주변에 상설시장(바자르)이 많아 호텔 주변에서도 시장구경을 다니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농산물 시장에는 여러가지 상품들이 다양한데, 특히 동포인 고려인들이 살아서인지 김치, 젓갈 등 친숙한 물품들도 많이 보였다.

         

카자흐스탄에는 10만 여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사업, 유학 등 목적으로 3,000여명의 한국 국적 재외동포들이 새로운 교민사회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흔히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카자흐스탄 동포 대다수는 190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의 극동 지방에서 강제 이주한 초기 한인 이민의 후예들이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톡 등에 둥지를 틀고 20세기초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에 이동휘․홍범도 장군 등이 이끄는 항일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이들이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되면서부터였다.

 

1937년 8월 소련 정부는 한인에 의한 일본 간첩행위 근절을 명분으로 연해주 거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다는 결정을 했고, 그 해 9월 최초로 약 17만명의 한인 이주민을 실은 열차가 카자흐스탄에 도착했다. 마침 겨울이 시작되던 때라 이주민들의 고초는 막심했고 추위와 홍역 등 질병으로 어린이의 60%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 때 카자흐인들은 소련 정부의 강제적인 집단농장 정책으로 약 200만명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겪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지에서 온 한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현재도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카자흐인들의 그 당시 환대와 친절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에는 130여 민족이 각기 다른 민족적 전통과 특성을 지닌 채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한 민족집단의 고유한 전통과 사회적 적응력은 다른 민족들에게 부러움이나 질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어렵게 정착한 소수민족이지만 고려인에 대한 속설은 바람직한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인은 부지런하다. 고려인들이 전통적으로 농업에 종사해 오면서 민족 특유의 근면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1990년대 중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우리는 불굴의 정신으로 노력하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으니 예전에 고려 사람들이 빈손으로 강제이주당해 황무지에 버려졌으나 그걸 옥토로 일구며 생존해 왔던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 적도 있다.

  2) 고려인은 모두 부자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이런 속설이 생겨난 것은 고려인이 근검절약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고, 자본주의 경제방식에 잘 적응하여 부를 축적한 고려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고본지(계절농사)’로 여러 해 동안 짭짤한 수익을 올리곤 했는데, 그 인상이 타민족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본지’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봄에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나 카프카즈 등지로 가서 땅을 임차해 농사를 지은 후 가을이 되면 미리 계약한 만큼의 수확량을 돌려주고 나머지는 개인수익으로 챙겨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농사방식을 말한다. 타민족들은 고려인이 온몸을 바쳐 일구어낸 고통은 생각지 않고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만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3) 고려인은 부모를 잘 섬기고 가족간에 화목하다. 가족간의 유대를 중시하고 장유유서의 윤리를 엄격히 지키는 유교문화 전통을 이어받아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에 타민족들이 부러워하는 부분이다. 유교문화에 생소한 중앙아시아 민족들, 특히 유럽계 민족들에게는 이러한 전통이 경이롭게 보였다고 한다.

 

  아스타나 시내에서 약간 동북방향에 있었던 호텔 주변에도 이런 정도의 시장이 여럿 있었다. 

 

  시장건물 1층에는 대게 농수산물과 육류 등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모양과 맛은 별로였지만 김치와 된장도 있어 정겹다.

 

  두부도 보이고 우리 정서와 비슷한 식품들이 제법 있어요. 

 

  백김치와 오이소박이도 있어요. 과채류는 오이와 토마토를 많이 먹더군요.

 

  바다가 없으니 생선은 별로인데 바다생선은 노르웨이나 북극 쪽에서 기차로 온다고 하고, 호수나 강에서 나는 물고기는 많아요.

 

  양념류와 조미료도 다양합니다.

 

  슈퍼에는 잘 포장된 쌀이 진열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비닐봉지에 1kg씩 담아서도 가격은 250텡게(3,000원 정도)로 비슷하네요. 

 

  작년까지는 쌀 1kg에 150텡게 정도였다는데, 우리나라는 풍작으로 안올랐지만 국제곡물가격 인상으로 여기도 많이 올랐습니다.

 

  약간 붉은 색이 나는 유색미(2배 이상 비싸네요)와 잡곡류도 보입니다. 중국 서쪽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거기에서 많이 들어옵니다.

 

  국화, 알로에, 오렌지, 녹차 등 한글로 표기된 스킨게어 제품인데, 원산지 표시가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중국산인듯 합니다.

 

  가까운 곳에 비슷한 다른 바자르(BAZAR)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래되는 쌀은 좀더 쌉니다(220뎅게/kg)

 

  밀은 1kg에 100텡게네요.

 

  밀이 주식이다 보니 밀가루는 10kg으로 포장단위가 더 큽니다.

 

  키위, 바나나, 오렌지 등 수입산 과일도 많이 진열되어 있어요, 양파도 과일과 같은 줄에 있네요.

 

  가격이 개당인지 kg당인지 정확하지 않은데, 못생긴 오이가 파프리카나 바나나보다 비싸네요.

 

  붉은색 양파와 무, 호박, 순무같은 것도 있는데, 점원이 명찰을 달고 있네요.

 

  양고기 요리에 많이 쓰이는지 향신료가 아주 다양합니다. 

 

 

 농산물 시장 2층에는 공산품도 같이 있는데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그 털모자를 파는 전문점도 있다. 가벼운 등산모자만 가지고 갔기에 추워서 견디기 어려우면 기념도 될겸 하나 사보려고 둘러보았는데,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다. 동물 모피로 만들어서인지 사진에 보이는 모자는 적어도 20만원 정도에서부터 시작하여, 비싼 것은 무려 500만원이나 가는 것도 있었다. 국민소득은 우리의 절반 정도 수준인데 생필품인 털모자와 외투 등 방한복 가격은 우리보다 품질은 떨어져 보이지만 더 비싸니, 다음에 누가 겨울에 가실 일이 있으면 국내에서 방한복장을 준비해 가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