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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의 도시 수원에 있는 정조 융건릉

곳간지기1 2012. 2. 11. 20:25

 

효원의 도시 수원과 화성에는 정조와 사도세자에 관련된 유적이 많다.

융릉 옆에 '용주사'가 있고, '화성행궁'은 정조의 능행차시 머물던 곳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의 능이고,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융릉과 건릉을 합쳐 '융건릉'이라 하는데, 정조의 효심이 묻어있는 곳이다.

귀한 손님이 와서 겨울이지만 모처럼 융건능을 잠깐 산책할 기회가 있었다.

융건릉 역사문화관에서 기억에서 아물아물했던 과거 역사를 되새겨 본다.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건 - '뒤주에 갖힌 사도세자의 비극'- 이 있다.

영조는 맏아들 효장세자를 일찍 잃고 7년간 후사가 없다가 42세에 아들을 얻었다.

아들이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하고, 후에 대리청정을 시킬 정도로 각별했다.

그러나 노론이 외면한 대리청정으로 순탄치는 않았다. 세자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몇 차례 괴이한 행동(궁녀 죽임, 여승 궁녀, 20여일 관서지방 유람 등)을 보였고,

 영조의 미움을 사 폐서인이 되고 뒤주에 갖히게 되는데 정치적 배경이 복잡하다.

 

비운의 사도세자 둘째아들인 정조(1752~1800)는 영조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 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장조로 추존)의 아들이다' 라고 천명하고,

억울하게 뒤주에 갖혀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힘쓰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화성'을 쌓는 등 조선후기의 중흥과 정치개혁을 이끌었던 개혁군주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축만제 등 농업진흥과 과학기술 진흥에도 힘썼다.

 

 

조선 후기(22대, 1776~1800 재위) 개혁성이 강했던 군주였던 정조대왕의 건릉

 

수원의 남쪽 외곽 용주사 옆에 위치한  융릉, 건릉 입구

 

서울 경기 지역에 집중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조선왕릉 40기,

문화유산으로 보존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융건릉 입구에 있는 역사문화관에서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정조 재임시 장조로 추존되었던 비운의 사도세자 현륭원 

 

효심이 깊었던 정조가 융릉에 원행하던 길에 양로연을 베풀었던 모습,

화성행궁 건축기록, 정조 원행, 혜경궁홍씨 회갑연 등이 그림으로 보존되어 있다.

 

융릉 건릉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숲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아이들 데리고 역사현장을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건릉에 대한 내력이다.

 

건릉 상설도 : 곡장과 능상, 망주석, 신도, 어도 등 왕릉의 전형이다.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길이 신도와 왕도로 분리되어 있다.

 

정자각 안에 제사를 지내는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능상)

 

제각의 단청은 많이 벗겨졌지만 지붕은 잘 보존되어 있다.

 

노송 숲이 산책코스로 일품이다.

 

융건릉 입구 주차장 옆에 수령 140년 된 향나무가 있다.

 

수원의 대표음식으로 수원갈비가 유명한데 근처에도 많다.

 

수원갈비집의 하나인 '화성별궁' 돌간판

 

서민들이 자주 가기는 어렵지만 갈비맛은 일품이다.

 

연구과제 관련으로 귀한 손님들이 와서 모처럼만에 갈비집에 갔는데,

'화성별궁' 내부로 들어가 보니 고풍스럽게 장식이 잘되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