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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곳간지기1 2012. 1. 20. 08:30

 

소백산 자락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영주에 가면 '소수서원'이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조선 중종 37년(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회헌 안향 선생이 공부하던 곳에 사묘(祀廟)를

세우고(당시 지명 순흥), 그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세운데서 비롯되었다.

안향 선생은 이조시대 통치이념과 사회규범의 기반을 이루게 한 학자다.

 

그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시 상소를 올려 명종 5년(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을 하사받으면서 왕실로부터 서적 노비 토지를

더불어 나눠받게 되어,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던 곳이다.

'紹修'는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旣廢之學紹而修之)"는

뜻으로 대제학 신광한이 지어올려 명종임금이 윤허한 것이라고 한다.

 

서원은 유교기반의 이씨조선 시대 국가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과 향교를

대신하여, 지역 양반들의 교육활동 중심지가 되었던 사설 교육기관이다.

특히 서원은 사설이었기 때문에 관학인 향교교육이 과거와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것과는 달리,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주의, 공리주의가 아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인격도야를 시켰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소백산 자락 영주시에 있는 민족교육의 산실 소수서원,

민족 정신문화의 산실이 되는 '선비의 고을'이다. 

 

원래는 '백운동서원'이었던 '소수서원' 앞마당에 있는 석등

 

'충효의 고장' 소수서원 입구

 

순흥향교에서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죽계천의 청다리(제월교)

 

사육신의 단종복위 실패사건에 연루되었던 선비들이 발각되어 순흥에 유배되고,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던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가족들 중 어렵사리 살아남은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데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자연과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고 능력과 돈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꽃길은 사라지고 꽃들은 시든다"

 

소수서원 정문 - 왼쪽부터 관람

 

소수서원의 앞마당 죽계천변에 있는 탁영대와 인공연못 탁청지,

작은 연못인데 가끔씩 물고기들이 수달에게 잡혀먹는다고 한다.

 

소수서원 경내에 있는 죽계천변의 송림군락,

적송 수백그루가 있는데 '세한송 학자수'라고 불리운다.

 

1543년 주세붕 선생이 세운 우리나라 최고의 서원정자 경렴정(景濂亭)

중국 북송의 철학자 렴계 주돈의 렴자를 따서 지었다는데 물맑을 렴자

 

죽계천변의 백운동 경(敬)자 바위

 

'백운동'은 퇴계 이황 선생의 글씨로 전해지고, '敬'자는 서원의 설립자 주세붕 선생이

바위에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글자,

 

단종복위실패로 참화를 당한 사람들의 피가 십리를 흘러 '피끝'이라는 지명이 있단다.

훗날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원혼들을 달래려고 붉은 칠을 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적 배경을 먼저 공부하고 소수서원 안으로 들어가 보자.

강학당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곳이다.

 

고려말 주자학을 도입한 거유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 사당

 

우리나라 대부분 사당은 사당사(祀)자를 사용하나, 왕과 제후급에 해당하는

국부로 추앙하는 대학자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 사당묘(廟)자를 썼다고 한다.

 

소수서원의 원장과 교수 등이 함께 기거하던 사무실 겸 숙소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인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두칸 뒤, 한자 아래 있다.  

 

영정각은 회헌 안향 선생과 신재 주세붕 선생의 초상을 봉안한 곳으로,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 선생의 초상과 주자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하신

'어제내사본'을 비롯, 3천여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원의 두가지 기능인 '제향과 강학'에 관한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목판, 고서 등 관련유물을 함께 전시한 사료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듣지 말며, 말하지 말며, 행하지 말라"

퇴계 선생의 평민교육 실천도장이 되었던 서원의 강학모습 등 

 

소수서원 사료관에 아주 특이한 유물이 하나 있다.

퇴계선생의 평민제자 배순의 묘지석이 보존되어 있다.

 

배순은 순흥부의 무쇠장이 평민이었으나 향학의지가 뛰어남을 보고

퇴계선생이 제자로 받아들여 양반이 아닌데도 학문을 전수하게 되었고,

후일 스승을 받든 도리로 배충신이라 칭하고 정려각을 세워줬다고 한다.

 

소수서원 중수기적비, 민족교육의 깊은 뜻을 되새겼다.

 

소수서원 관리사무실과 민족교육의 산실 '충효교육관'

 

단종애사 돌아보고 안흥과 퇴계 선생의 정신을 되새긴다.

기회 되시면 민족교육의 산실 소수서원 한번 둘러보세요.

 

식구들과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내려가면 며칠간 컴퓨터 못만진다.

전통있는 소수서원 사진으로 둘러보며 설명절 보람있게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