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단상/하늘목장 칼럼

기도 응답이 늦어지는 이유

곳간지기1 2009. 4. 27. 11:49

 하늘목장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목사님의 신앙칼럼을 월요일마다 보내주는 사람이 있어 여기에 올립니다.

 가끔 제가 직접 쓰는 칼럼인줄 알고 오해하시는 분이 있어 오늘은 먼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공지합니다.

 크리스찬에게는 가슴에 와닿는 절절한 말씀들인데, 혹시 기독인이 아닌 분들은 새겨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래서 기도 응답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고사성어에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도 '동상이몽'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꿈을 꿀 때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절박하게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소원합니다.

그토록 시급한 기도의 응답을 위하여

부르짖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작정기도도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배운 대로, 더 간절히, 더 통절하게 기도하려고 안간힘을 쏟습니다.그래도 기도의 응답이 없을 경우에, 정성(?)이 부족한가 싶어

더 많은 공을 드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별미를 드리기도 하고,

죄가 있어 그런가 싶어, 회개의 기도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기도의 사람은, 깊은 혼란과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기도에 대한 모든 것이 엉클어지기도 하고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영적 싸이클의 혼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 '영적공황'상태에 빠져

무기력과 영적우울증에, 허덕이게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묵상하려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많이 다르며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 하나님의 때도 많은 차이가 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에도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아무리 라디오 수신기가 좋아도, 내가 듣고자 하는 방송의 싸이클을 안 맞추면

아무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부르짖고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의 싸이클과 나의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아무 응답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 응답의 주파수는, 열심이 아닙니다.

간절한 부르짖음도, 아닙니다.

정성은, 더 더욱 아닙니다.

기도의 시간이 모자람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부르짖으라'고 강조하기도 하고, 오래 기도할 것을 주문하기도 하며

회개의 기도를 강력히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강청하는 기도를 주문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런 응답도 없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개월 심지어는 수년을 한결같이 말입니다.

그와 같은 때를 만나고 있는 성도들과,

통절한 기도의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분들과 이 칼럼을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초신자나 미숙신자일 경우에는,

별의 별 기도에도, 빠른 응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성장한 성도의 기도에는

너무도 더디고, 너무도 많은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통절하게 기도의 응답과 해결을 원하지만

하나님의 소원은 응답이 먼저가 아니라, 성숙과 성화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빨리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을 위하여 힘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성숙해지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기도에 대한, 동상이몽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동안에 아브라함이 어떤 기도를 안해 보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25년 동안이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얼른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무엇을 기다리신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성숙과 성화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응답으로 주시기 전에, 아브라함에 이런 주문을 합니다.

'할례를 받으라' 입니다.

이 말은 거룩을 말합니다.

성결을 말합니다.

응답 받을 그릇을 준비하라는 뜻이지요.

그릇준비 없이 응답을 받으면, 깨진 독에 물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응답 주어도 감당도 못하며

응답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고, 영혼이 잘못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빠른 기도의 응답이나 해결보다

오랜 기다림과 더딤을 통하여..

성도들은 훨씬 더 많이 성숙해지고 성화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 한나를 보십시오.

한나는 무자했습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매일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아들 달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기도일수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의 내용일 수 있습니다.

한나는 통절하게 기도하며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우리와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오래동안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는 동안에, 한나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숙한 믿음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나는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시간에, 성숙을 경험한 것입니다.


기도의 참 목적은 응답이나 해결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한나는 통절한 기도의 시간에,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 순간 한나는, 아들을 주셔도 좋고, 안 주셔도 좋고...여기까지 성숙합니다.

응답받을 그릇이 준비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의 두드러진 변화는, 얼굴의 변화입니다.

기도 후에 얼굴에, 수색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도달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들을 원합니다.

우리는 건강을 원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랍니다.

우리는 물질의 축복을 원합니다.

우리는 문제의 해결을 원합니다.

얼굴의 표정은 그대로이면서 말이죠.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표정이, 수색과 근심으로 충만하면서 말이죠.

성숙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말이죠.

깨어짐은, 커녕 더 단단해지면서 말이죠.


성숙 없는 복은 기복이며, 성화 없는 응답은 거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우리의 소원을 하루아침에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하루아침에도 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성숙하라는 것입니다.

성화되라는 것입니다.

못난 자아를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더 많이 부셔지라는 말입니다.

그릇을 성결하게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이러므로 부르짖는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과 기적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동안에,

우리의 자아가 파쇄되고 통절한 기도시간에, 우리는 성숙하게 되고

그 그릇에 하나님은 응답과 해결을 담아 주시는 것입니다.

비로소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응답의 태의 문을 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부르짖는 기도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에

우리는 가장 빠르게, 성숙하게 되고 성화되는 것입니다.


한나의 밝은 표정은..

아들을 얻은 후가 아니라, 아직 아들이 없었을 때에 경험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응답이나 해결 때문에, 얼굴에 수색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기도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얼굴에 수색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우리의 얼굴에 수색이 사라지면, 응답은 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태를 열어주실 때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달라진 때입니다.

성숙한 때입니다.

거룩해지는 때입니다.

얼굴의 수색이 사라지는 때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은 양보도 타협도 없으십니다.

야곱이 깨어지듯이, 한나가 성숙한 믿음의 반응을 보였듯이,

아브라함이 거룩을 준비했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야 하고

성숙한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하고, 거룩해져야 합니다.

성숙과 성화는, 응답과 기적을 담을 그릇이니까요.

야고보서에 보시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를 하기위해서, 우리는 먼저 의인되어야 합니다.

의인이란 성숙과 성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치원 다니는 자녀가 핸드폰 사달라고,

아무리 떼를 쓰고, 밥을 안 먹고, 울고불고 하여도

부모는 절대로, 그 아이의 간절한 요청을 안 들어줍니다.

왜요?

성장하면 사주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금은 받을 준비가 안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네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되면

네가 사달라기 전에, 부모가 알아서 먼저 사준다는 것입니다.

이미 유치원 아이가 핸드폰이 언제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부모가 먼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핸드폰 사달라기 전에, 먼저 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는 시간을 기다림보다,

부모가 그 시간을 기다림이, 더 지루하고 힘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에게는 아이에게, 핸드폰 사줄 능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태, 기적의 태, 해결의 태, 회복의 태를

빨리 열려면, 빨리 거룩해 지십시오.

얼른 응답을 받고 싶으면, 얼른 성숙하십시오.

야베스의 축복을 원하시면, 서둘러 깨어지십시오.


아들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고

건강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고

문제가 해결이 되어도 좋고, 안되어도 괜찮고

시집을 가도 좋고, 안가도 괜찮고

기적이 일어나면 좋지만, 안 일어나도 괜찮고

부요해지면 좋겠지만, 가난해도 괜찮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 수준까지, 끌고 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응답을 달라는 것입니다.

쓰레기통에라도, 밥 담아 달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동상이몽입니다.

너무, 배가 고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럴 수는 없지요.

그것은, 위험한 일이니까요.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어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한 순간에, 응답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응답 주시려고 기도를 하게 하시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며,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합니다.

눈물의 양을 채워야 합니다.

채워져야, 축복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영글어야, 응답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영글게 하고 채워지게 하는 것이, 성숙이며 성화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사무엘을 응답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수색 없는 얼굴을 소유한 기도의 사람을 통하여 기적과 해결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기도의 응답보다, 먼저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기도라고 하는 매체를 통하여, 성숙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부르짖음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성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거절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자아파쇄를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기도응답이 늦어지는, 성서적인 진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