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단상/하늘목장 칼럼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하든...

곳간지기1 2008. 4. 15. 08:23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하든, 비단길로 인도하시든.."


성숙이란..세속적인 나의 관점을 신령한 하나님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성숙이란..인간적인 주파수를 하나님 중심의 주파수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고난의 상당 부분은..

관점과 주파수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과 사고의 전환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고질적이고, 어릴 적부터 세속적으로 학습된 생각의 틀에..

하나님을, 가두려 하는 데서부터..

온갖 불행과 열등감과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나와 똑같거나 더한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천상의 삶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보다 더 작은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하늘이 무너지듯 소란을 피우며..

절망에 사로잡혀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그 차이는, 상황과 문제의 경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에, 근거한다.


바울의 삶을, 묵상해 보라.

바울의 비전과 꿈은, 오직 하나였다.

'로마의 심장부로 들어가, 복음의 비수를 꽂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27~28장에 보면, 바울은 소원한대로 로마로 입성하긴 하는데..

그의 행색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중한 죄수의 몸으로 온몸이 결박된 채, 죄수의 호송선을 타고..

너무나도 볼품없고 초라하게, 로마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 바울을 이런 모습을 향하여.. 축복이며, 영광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바울의 이런 몰골을 보고, 성공한 목회자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종'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다르시다.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과 중심을 보신다.


사도행전 28:15절에 보면 "맞으러 오니" 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 단어는 본래.. 왕들이나, 개선장군이나, 대사를, 칭할 때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의사 누가는..

죄수의 몸으로 결박된 채, 로마로 입성하는 바울을 향하여..

'개선장군'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의 예리하고 영적인 통찰력은, 바울의 외모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울을 보고 있었다는 근거이다.


보통사람이라면(세속적인 관점을 소유한자)..

혀를 차며.."��...안됐구만"

"복음의 사도가 되어, 로마로 들어가 로마를 복음화 시킨다고 큰소리치더니만..

저 꼴이 무어랴"

"목회도, 사역도, 처절하게 실패했구만"

"아마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신가보네.."

 

이렇게, 평가하고 관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누가는, 신령한 잣대로.. 바울의 삶을 평가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죄수의 몸으로 결박되어, 비참하기 그지없지만..

바울 속에,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부요한 것을..

그리고 죄수된 바울을 통해, 앞으로 로마에서 할 거룩한 일을.. 주목하고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영의 눈으로 보면..

결코, 실패자도 아니요.

불행한 사람도, 아니요.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대사로, 누구도 할 수 없는 고결한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모든 것을..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으로, 평가하고 판단한다.

자신의, 삶마져도..아니다.

영적인 관점으로 보면, 바울이 쇠사슬에 묶여 결박된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입성하든..

초췌하고, 까칠한 몰골로, 로마로 입성하든..

날마다, 굶기를 밥먹듯 하고..

헐벗고, 매맞고, 온갖 수난을 겪으며, 로마로 입성하든 전혀 상관없다.


우리의 삶도, 마차가지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이것이, 문제이지..

우리가 시집을 갔든 못 갔든..

장가를 갔든 못 갔든..

직장이 있든, 실업자로 살든..

건강하든, 아프든..

 

대형교회 목회자로 사역을 하든, 개척교회로 사역을 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초가에 살든, 궁궐에 살든..

걸어다니든, 벤츠를 타고 다니든..

강남에 살든, 강북에 살든..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다.

적어도, 영적인 관점으로는 그렇다.

오직 나로 인해.. 복음의 비수가 어딘가에, 누군가의 가슴에, 꽂히고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늘.. 이 땅에, 시시콜콜한 문제들로 인하여, 사네 죽네 하며 징징댄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숭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의 결과에 따라..

널을 뛰며, 희노애락을 갖는다.

그러나 적어도..

누가가 바울을 통찰한 관점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든, 상관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하게 하여, 가시밭길을 걷게 하시든..

꽃가마를 태워, 비단길을 걷게 하시든.. 전혀 상관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의 관점으로, 가슴이 열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관으로, 깨달아지기 시작한다면..

"어떤 형태로 내가 인생을 사느냐" "사역을 하느냐"는, 도무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세상 가치에, 내가 붙들려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려 삶으로,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오직 주를 향한 사랑의 마음과, 영혼에 대한 불타는 열정으로..

내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돈 없음이, 문제가 아니다.

건강이 나빠, 문제도 아니다.

주거환경이 불편해, 불행한 것도 아니다.

하는 일마다 되지 않는 것이, 속상한 것이 아니다.

일이 꼬이고 막혀, 좌절하는 것이 아니다.

응답이 없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원망함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관점의 굴절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역사관과 신령한 관점을 소유하는 복을 받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일 수 있다.

이것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의 자원이며, 성도의 특권이다.

이런 삶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시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가치관과, 관점이 바뀌지 않는 이상..

언제나, 우리 마음은, 지옥이다.

그러나 지옥같은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관과 신령한 관점을 소유하고 살면..

저주같고 형벌같은 삶일지라도, 언제나 마음은 천국생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