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동포집단이다. 바야흐로 선진화된 경제대국을 꿈꾸는 우리나라로서 더 이상 고려인 문제를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시책이 해외농업진출 활성화 정책과 동시에 추진될 필요성이 크다고 하겠다. 특히 이 지역들은 토지자원이 풍부하나 농업생산성이 떨어져 한국의 농업기술협력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농업의 해외진출 전략에도 중요한 인적자원이 될 것이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는 1930년대 극동지역에서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당했던 '고려인' 동포가 50여만명 살고 있다. 그 중에 우즈베키스탄에 가장 많은 18만, 카자흐스탄에 10만, 사할린 4만, 연해주 4만, 모스크바 4만, 러시아 남부지역 5만, 우크라이나 3만, 타지키스탄 등 기타지역 2만명 등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 농업개발에 기여한 고려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소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집단농장 체제가 붕괴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늘날의 고려인은 1860년대 초부터 가난과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던 한인들의 후손이다. 러시아의 농업개발을 위해 1937년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10여개 불모지대로 강제적으로 이주되었다.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CIS(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의 집단농장 농지 재분배 과정에서 소수민족은 차별대우를 받아 특히 농업에 종사하다 소외된 계층이 많이 생겨, 생업의 어려움과 자녀교육 기회의 2중고 속에 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집단농장(콜호즈)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김병화 농장', '황만금 농장' 등 노동영웅을 배출하는 유명한 농장을 꾸리기도 하였다. 타쉬켄트 남쪽에 위치한 '김병화 농장'은 1925년 북극성 농장으로 창설되어, 1974년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되었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당시 최초로 정착하였던 지역의 하나로 당시에는 갈대밭이었으나, 김병화가 1940-74년간 농장 대표를 역임하면서 고려인 중 유일하게 2차례나 노동영웅 훈장을 받으며 정부로부터 인정받는 우수한 집단농장을 조성하였다. 그 후 개인영농화 과정에서 토지분배를 받지 못한 다수의 고려인이 떠나 현재 고령화된 1,000여명의 고려인만 거주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농업투자환경 조사를 갔을 때, 이 농장마을에 들렀더니 마을 입구에 초라한 '김병화 박물관'이 있고 할머니 관장님이 우리말로 친절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김병화 선생의 업적과 고려인 마을의 변화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방명록을 보니 실크로드 여행이나 출장 목적으로 여기에 다녀간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고, 고려인 동포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좋은 방안을 모색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자립의지와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업이 좋을듯 하다.
타시켄트 남쪽 우르타치르칙구에 있는 '김병화 농장' 마을 입구에 '김병화 박물관'이 초라하게 서있다.
김병화 농장 마을 입구, 구소련 시대 '북극성 집단농장'이 김병화의 지도력으로 성공하여
높은 생산력을 올리자 1974년 국가에서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고려인 마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수로가 있다.
김병화 박물관, 이 마을 고려인 회장이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걸어나오고 있다.
박물관 마당에 김병화 동상이 있는데, '이중사회주의 로력영웅'은 러시아 정부에서 주는 노동훈장을 2회 수상했다는 뜻이다.
1974년 우즈벡 국회법령에 의해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 당시 김병화 농장은 토지규모 3,127ha, 농가수 1,924가구,
주민수 7,828명(고려인 1,543명), 파종면적 2,098ha(목화 1,053, 밀 800, 쌀 218ha 등)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고려인 1,000여명만 남아있다.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 노동영웅 훈장을 2번(1947년, 1951년) 받은 김병화 선생 말씀
김병화 박물관 관장으로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장 태 에밀리아' 할머니, 사범대학을 나오 교사 출신이라고 함.
"우리들의 가장 큰 자산은 여러민족의 근면함이다"
-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특히 고려인을 지칭해서 찬사를 보낸 말이다.
김병화 농장의 생산활동, 농업생산(대형기계로 수확하고 헬리콥터로 방제하는 사진도 있다), 김병화와 함께 하던 동료들
'김병화 농장' 시절 김병화와 함께 하던 동료들, 교육과 주민들의 휴식문화 시설을 잘 갖춰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김병화 농장주의 지도력으로 높은 수량과 생산성과를 올려 러시아 정부로부터 2차례 노동영웅 훈장(훈장증 사진)을 받았다.
당시의 개인별 노동 기록부, 집단농장이지만 개인별 성과관리가 철저하게 이뤄졌다.
1926년 러시아 극동지역 거주 한국인은 167,400명이었다고 하는데, 러시아 남부 농업개발을 위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김병화 제5대 농장장으로 1940-1974년 35년간 봉직하며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그 이후 7대 농장주부터 현지인으로 교체
목화재배와 누에고치 등 양잠이 중요한 생산품이어서 생산부터 가공까지 일관처리하였다.
'고려인 농장의 급속한 발전 현상'이 현지 잡지에 크게 소개되었다.(목화밭에 수확하러 가는 사진)
김병화 박물관에 방명을 남기고 간 한국사람들의 흔적들... "김병화 선생의 업적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갑니다."
현재 이 마을 고려인 회장(Lee Felix)으로부터 김병화 농장의 운영현황과 고려인들의 삶에 대해 청취하고 있다.
김병화 농장 마을 현재의 모습, 고려인들은 농지분배를 받지 못해 소작인으로 전락한 가구가 많고 젊은이들이 많이 떠났다.
고려인 문화협회(1991년 창설, 회장 신블라디미르), 총리실 산하 소수민족 문화부흥 지원센터에 고려인 대표단체로 공식 등록
* 참고 기사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436692&code=13220000
'국내·해외 여행 > 중앙 아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즈벡15]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공예품들 (0) | 2009.09.01 |
---|---|
[우즈벡14] 실크로드 거리에서 본 풍경들 (0) | 2009.08.13 |
[우즈벡12] 우즈벡에 한국농업의 뿌리 내리다 (0) | 2009.07.19 |
[우즈벡11] 시가지를 벗어나면 온통 민둥산 (0) | 2009.07.18 |
[우즈벡10] 우즈벡의 밀, 면화 기름 가공공장들 (0) | 2009.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