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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석 칼럼] 에너지 이어 식량까지

곳간지기1 2008. 3. 17. 09:38

[윤재석 칼럼] 에너지 이어 식량까지 (국민일보 2008. 3. 7)

 

지난달 19일 저녁. "오는 길에 빙과류 좀 사오라"는 집사람의 주문에 집 근처 대형 할인마트에 들렀다가 아연실색했다. 라면코너는 초토화되어 있었고, 일부 스낵 코너도 휑하니 비어 있었다. 전날 (주)농심이 20일부터 낱개에 100원씩 올리겠다고 발표한 이후 나타난 현상이었다. 문득 1996년 6월 핵 위기 때가 떠올랐다.

"이젠 거의 주식이 되어버린 라면을 20% 가까이 전격 인상한다니 말이 되느냐"는 세간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는 국제 곡물 가격에 업체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가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애그플레이션, 즉 곡물가격 급등에 따른 일반 물가 앙등은 시작에 불과하다.

기실 애그플레이션이 갑자기 도래한 이변은 아니다. 미 농무부 전망에 따르면 올여름 전 세계 곡물 재고율은 14.6%로, 1972∼73년 곡물 파동 때의 15.4%를 밑도는 사상 최저 수준이다. 재고율 전망치는 작년 11월 15.2%로부터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주요 곡물가격이 지속적으로 초강세를 이어가면서 애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곡물가격의 급등 요인은 복합적이다. 지구온난화 가속에 따른 바이오에너지 개발 열기로 옥수수·콩의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중국·인도 등 신흥시장의 육류 소비 증가에 따른 사료 수요 급증이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달러 약세에 따른 투기자본의 곡물시장 개입과 유가 상승으로 인한 곡물 운임 인상도 사태 악화를 부추겼다.

곡물 메이저들의 장난과 함께, 주요 곡물수출국들이 식량 자원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작년 11월 보리와 밀에 각각 30%와 10%의 수출관세를 부과했고, 우크라이나는 밀·옥수수·콩 등에 수출 한도를 설정했다. 중국은 1월부터 쌀·옥수수·밀가루 등에 5∼25%의 수출관세를 물리기 시작했는가 하면, 밀 생산대국인 카자흐스탄도 곡물에 수출관세를 물리겠다고 선언했다. 이들 나라는 물가를 잡으려 수출을 억제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경제적 이익과 더불어 식량자원의 무기화를 노린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문제는 해결할 뚜렷한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더욱 딱한 것은 '식량 빈국'인 우리다. 곡물 자급률 28%로 최하위 수준의 '식량 빈국'으로 도저히 대책이 서지 않는다. 우리가 식량 위기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주요 곡물에 대해 수입만능주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해 초래한 당연한 결과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앞으로 각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순차적으로 이뤄져 농산물 시장 개방이 확대되면 빈국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주무부서인 농림수산식품부는 느긋한 편이다.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사료 구매자금 1조원 저리 지원, 사료용 곡물 할당관세 인하 등 미봉책 일색이다. 중기 대책이라고 기껏 내놓은 게 유휴 농지에 사료작물 재배를 장려하는 시책 정도다. 그밖에 장기적으로 국내 농지의 효율적 이용, 국외 농업투자, 수입 다변화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 또한 선언적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욱이 한국전분당협회는 이르면 5월부터 국내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전분과 전분당 제품에 유전자변형농산물(GMO) 옥수수를 원료로 쓰겠다고 밝힌 상태다. 아직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GMO를 말이다.

그동안 우린 너무 순진했다. 시장 경제 상황에서 모자라는 식량은 수입해 먹고, 경쟁력 있는 공산품을 내다 팔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곡물 식량 부국의 식량 무기화는 앞으로 더했으면 더했지 나아질 가망이 없다. 더욱이 이번 애그플레이션은 식량의 구조적 수급 불균형에 따른 것이다. 바꿔 말해 만성적 현상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제야말로 근본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다. 동북아의 두바이를 만들겠다는 구상으로 농지비율을 대폭 줄이려는 새만금 활용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하고, 유휴농지 경작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중앙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의 해외 농지 및 농산물 안정적 확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