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하늘목장]
살다보면, 도무지 동의할 수도 용납도 안되는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런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과 혼란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막아주실 수는 없었는가?', '꼭 그렇게 하셔야 했는가?'라는 푸념들이 솟구치게 된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섭섭함과 혼란 속에는, 우리의 세속적인 관점과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데반이 돌에 맞아 피투성이 되어 죽어가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등장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꼭 저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셔야 하는가?
'하나님이 막아 주시거나, 돌로 치는 사람들을 굳어버리게 하사, 돌로부터 지켜주실 수는 없었는가?'..
그렇게도 신실하고 성령충만하던 스데반을 꼭 저렇게 불행하고 비참하게, 죽도록 방치하시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면 전혀 다른 각도로, 이해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스데반은 겉으로는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지만, 속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눈부신 영광을 보고 있다.
그리고 허리를 구부려, 내려다보시는 주님을 똑똑히 보고 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구질구질하게 이 땅에 남아 생명을 부지하려는 자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스데반 또한, 다르지 않다. 얼른 돌에 맞아, 사랑하는 주님 곁으로 그리고 그토록 사모하던 하나님의 나라로, 입성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육적인 관점으로 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불행하고 비극적인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영적인 관점으로 보면, 스데반은 죽음은 단순히 죽음이 아니라, 순교자 반열에 들어가는 최상의 순간이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허락하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의 고난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불행하고 불쌍한 일이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건 축복이며 영광이며 최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허락하심이, 최선이며 최상이다.
요셉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적으로는 하는 일마다 꼬이고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배후에서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믿었기에, 그의 삶은 언제나 최선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이 형벌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깨달아진다면 그 삶은 최선이다.
그러나 아무리 탄탄하고, 평야같은 삶을 달릴지라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최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날라오는 수많은 돌들 앞에서 우리가 할일은, 돌을 피하거나 숨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일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영안이 열려, 날 위해 허리를 구부려 응원하시는 주님이 보일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누가 뭐라 해도 최선이라 할 것이다.
성숙한 신앙이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의식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삶을 어떻게 인정하실까?를, 의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람데오의 삶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나의 삶을 최악이라 해도, 주님 한분으로 충만하고, 충분한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최선의 삶을, 최상의 영성을, 누리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문제는.. 고난의 유무가 아니라..
나의 영안이 열려, 하늘을 보고 있는가?와..
하나님의 영광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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