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도 거듭 이야기했지만 오해가 없도록 이쯤에서 다시 한번 밝혀드립니다.
'하늘목장 칼럼'은 제가 직접 쓰는 것이 아니고, 하늘목장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어느 목사님의 크리스찬의 올바른 삶에 대한 영감 있는 신앙생활 칼럼입니다.
월요일에 한편씩 보내주시기 때문에 한 주일을 시작하며 한번 생각해 봅니다.
공감되시는 분들은 댓글도 달아주시고 생활의 지침으로 할용하시기 바랍니다.
"위로의 힘 - 내가 만난 의사"
얼마 전..
내가, 정기적으로 다니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나누려 한다.
나는.. 그 당시, 목 부분과 등 쪽에 10~20회 정도, 주사를 찔러 약물을 주입하는,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환자의 마음과 고통을 공감하고, 아픔으로 인해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의사 분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셨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만나면, 어디가 아프냐보다, 얼마나 아프냐고 다가와 주셨고..
아주 세심한 부분과, 환자의 내면의 고통까지 헤아려, 어루만지며.. 배려해 주셨다.
단지.. 병을 고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병의 근원과, 스트레스 요인까지 짚어 주셨다.
게다가.. 주사치료를 할 때는, 나보다 더 긴장하시며.. 내가 당할 고통을, 최소화 시키려.. 무진장 애를 쓰셨다.
그로인해, 통증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도, 능히 고통을 감내하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분은.. 나의 육체뿐 아니라, 병으로 인해 초췌해진 나의 마음도, 추슬러 주시는 따뜻한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한번은..
그날도 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찾았는데, 다른 의사분이 내게 다가오셨다.
나는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고..
원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오늘부터 또 다른 의료진이 함께 진료를 보신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 내게 배당된 의사 분은, 별말 없이 차트를 보신 후.. 주사를 투여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사를 두번 맞은 후,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치료 중단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분은..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떠나시고, 잠시 후 내 담당 원장님이 오셔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나의 어깨를 감싸고, 두드리며.. 내 귀에다 대고, 다급하고 애절하게 하시는 말씀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제가 진작 배려해 드렸어야 하는데..
이제 앞으로는.. 아무리 바빠도, 제가 돌봐 드릴게요.. 죄송해요“
그리고, 남은 주사를 놓으셨다.
그리고 한번 주사를 찌를 때마다.. “잘 참으셨네요, 고생하셨어요” 하신다.
그리고, 그날도.. 덜 아프고, 덜 힘들게.. 치료를 끝낼 수 있었다.
나는 그날에 있었던 일을 통해.. 그리고 나를 담당하신 원장님을 통해, 진정한 위로와, 위로자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주님은.. 위로자로 우리에게 오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만나면, 위로를 받게 된다.
주님은.. 아프고 힘든 우리에게, 왜 아프냐고, 왜 힘드냐고, 다그치신 적이 없으시다.
사람들은 종종.. 누군가를 위로해 준다고 하다가, 오히려 상처만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픈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아파본 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아픈 자에게는.. 건강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상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더, 가난한 자가 와야 한다.
더 가난한 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이기 때문이다.
고민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고민 중에 있는 사람의 위로가.. 힘이 된다.
고난 밖에 있는 사람의 위로는.. 오히려, 가식과 위선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온갖 고통을 체휼하셨다.
그 분은.. 우리가 당한 고통의 백배, 천배만큼의, 심적, 육체적, 영적 고난을 겪으셨다.
그래서 주님의 위로는.. 우리에게 힘과 소망이 된다.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할 정도로..
탈진하고, 영육이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정죄하거나 책임 추궁하지 않으셨다.
주의 종이, 왜 그리 절망하느냐?
왜 그리.. 믿음이 없느냐?
그것 하나, 못 감당하느냐?
왜 그렇게도.. 연약하고, 부족하냐? 고 말이다.
다만.. 조용히 다가오사, 어루만지시며..
"엘리야야..내가 다 안다. 얼마나 힘들면, 네가 그러겠니?
나도 너라면.. 죽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 내가 준비한.. 고기와 떡을 먹고 기운 차려라.
너는 내게, 대단한 존재란다."
이것이, 위로이다.
위로는 공감이며, 이해이며, 배려이다.
위로는.. 주님의 마음이다.
위로자는.. 주님의 마음을 이식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
아픈 사람을 보면, 왜 아플까가 아니다.
그냥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다.
가난한 사람 보면.. 왜 가난하냐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다.
도와주고 싶어, 못 견디는 마음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 보면, 그 사람의 고통이 느껴져서.. 힘께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다.
지금은.. 위로자의 부재 시대이다.
설교자는 많으나, 위로자는 없다.
고난을 모르는 설교자는.. 오히려 청중들에게, 짐과 상처만 더 할뿐이다.
지금은.. 말없이 다가와, 아픈 곳에, 더 아픈 주사를 찌르는, 의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픈 환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아픈 환자의 마음을 위로하며..
실제의 아픔을 완화시키는 인술과 의술을 겸비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난을 공감해 주시고, 위로해 주실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고난과 아픔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전능하신 위로자이시다.
위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어야 한다.
위로는 기도가 아니라, 빵 한 조각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위로의 공동체여야 하고, 목회자는 위로의 리더십을 품어야 한다.
성도는.. 치유 받은 위로자로, 세상과 주님을 연결하는.. 중보자여야 한다.
어느 누가.. 아무리 대단한 위로로, 우리를 위로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위로는, 말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는 다르다.
병든 자를 위로하시며, 실제로 병을 고쳐주셨다.
배고픈 자를 위로하시며, 빵을 나누어 주셨다.
목마른 자를 위로하시며, 마실 물을 주셨다.
그래서 주님의 위로는, 완벽한 위로이다.
그분께, 다가가 울라!
투정을, 부리라!
떼를 쓰기라도 하라!
주님은.. 다 공감하시며, 들으시며, 품으시며, 보듬으시는.. 진정 위로자이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천 마디의 말보다, 한 마디의 위로가 운명을 바꿀 수 있고..
때로는.. 천 마디의 위로보다, 한 조각의 빵이.. 한 영혼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천 마디의 말보다.. 말없이 다가가, 손 한번 잡아줌이.. 기적과 치유를 경험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설교자,, 은사자, 사역자, 지성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위로자를, 찾고 계신다.
의사로 말하면.. 허준같이 인술과 의술을 겸비한, 명의 말이다.
21세기형 리더십도.. 실력과 따뜻한 마음으로 균형을 이룬.. 위로의 리더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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